우중산행(雨中山行)

추억이라는 것은 오래 전의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 또는 그 생각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메모리(memories나 recollections)라 할 수 있습니다. 추억은 돌이켜 생각해 볼만한 사건들이겠지요. 옛 일이지만 생각하면서 즐겁게 회상에 잠길 수 있는 기억이 바로 좋은 추억이죠. 따라서 좋은 추억거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인생을 나름대로 풍성하게 살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돌이켜 볼만한 추억이 별로 없다면 그것처럼 허무한 인생도 없을 것입니다. 매우 은밀하고 사적이고 볼 품 없는 것이라도 자신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라면 당사자에게 그것은 충분히 음미할 가치 있는 추억이지요.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발자취입니다. 다만, 어떤 이는 타인과 공유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매우 사적인 영역으로 남기는 것만 다를 뿐이죠.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발자취를 홀로 기억하거나 때로는 그것조차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채 살고 있지요. 우리의 인생은 때로 잊혀진 과거가 되기도 하고 기록된 과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덧 그게 바로 한 사람의 긴 인생입니다. 즉, 우리 모두는 기록된 인생과 기록되지 않은 인생 모두를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추억 중에는 마치 판타지 같은 몽환적 순간도 있겠지요. 삶에 지치고 힘들 때 가만히 꺼내 토닥거려 줄 수 있는 꿈 같은 그런 추억의 순간 말입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을 비교적 많이 간직하고 있어서 꺼내 볼 추억들이 많은 편입니다. 그 중에 저에게 판타지 같던 한 여행을 떠 올려 보렵니다.

[이 글은 꽤 오래 전에 써 놓은 것인데, 이제야 내 블로그에 올린다. 사람마다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추억도 있는 법이다. 그러다 가끔 공유할 용기도 내는 것이다.]

오디오문화공간

내가 서초구 방배역 귀퉁이에 있는 어느 수입서적 회사에 근무할 때였다. 1991년 어느 봄 날이었다. 당시에 우연히 회사 주변의 전봇대에 붙은 회원 모집 홍보물을 보고 찾아간 곳이 ‘오디오문화공간’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예술의전당’ 방면의 언덕 길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길 끝 무렵에 있었는데 퇴근 후에 손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오디오문화공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악기를 수입하고 판매를 하는 회사 안에 있었다. 문화예술지원에 관심이 많은 그 회사 대표의 영향으로 건물 안에 영화를 볼 수 있는 소극장을 마련해서 중앙대학교 영화연극학과와 그곳의 대학원에서 다큐멘터리 연출을 전공한 한 남자를 그 회사에서 섭외해서 그로 하여금 그 문화공간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영화 관련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강의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곳을 운영할 간사로는 그 회사에서 사내 방송을 담당하던 한 여직원이 맡았다. 홍보 전단지를 보고 즉시 여러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여 들었으며 우리는 그곳에서 영화를 보고 영화 관련 이야기를 나누면서 재미 있는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멤버들과 그 해 여름에 나의 고향인 강원도 시골의 나의 부모님 집으로 피서를 갔다. 당시에는 우리 멤버들은 모두 학생이거나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모두들 한국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을만큼 어른이 되었다. 그때 함께 여행을 떠난 멤버들은 아래와 같다.

현재 영화제작사 대표를 하고 있는 이형승, 그의 친구로 심형래 씨 처남이었던 김영동(지금은 그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그리고 외국어대학교와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이종혁으로 지진희, 염정아 주연의 영화 “H” 등을 연출(지금은 그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이종혁의 친구로 몇 년 후 SBS에서 다큐멘터리 피디로 일했던 한 남자(지금은 그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그리고 연세대 사학과 출신으로 공무원 준비를 하던 나와 동갑이었던 이미경 씨(지금은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한 출판사에 다니던 승현(지금은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프랑스 유학을 준비 중이던 한 여성(지금은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문화공간의 간사였던 A는 그후 어느 방송사의 아나운서가 되어 있을 것 같다 (지금은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와 그녀의 친구 B(그때도 그녀에 대해 잘 몰랐고 지금은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당시에 오디오문화공간의 프로그래머로서 서울프로덕션의 피디로 활동했던 이상모 씨(지금은 그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당시에 서울대 지리학과에 다니던 함영훈(KBS PD로 드라마 ‘태양의 후예’ Chief Producer: CP. 지금은 JTBC에 있다), 그리고 지금은 워싱턴 DC 한국일보 편집국장으로 있는 이종국 선배 등이었다.

당시 우리들은 한국 나이 기준으로, 출판사에 다니던 승현이 서른 중반으로 가장 많았을 것이며, 이상모 씨가 서른 셋 정도, 이종국 씨가 서른, 내가 스물 여덟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나보다 두 세 살 어리거나 스물에서 스물 서너살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서양 나이의 기준으로는 여기에서 최소 1~3살은 더 내려야 할만큼, 우리 모두는 한창 청춘이었다. 그리고 모두 솔로였다.

IMG_20180105_0001.jpg

IMG_20180105_0003

사진 설명: 위의 사진들은 1995년, 나의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고양시 나의 집에 참석한 사람들이다. 당시 우리 부부는 경기도 고양시 옥빛마을에 살았다. 이 사진에는 당시의 오디오문화공간 멤버들이 3명 있다. 맨위의 사진 중 왼쪽 가운데 안경 쓴 사람이 이형승, 오른쪽 끝이 함영훈이다. 촛불을 끄고 있는 사람이 나의 아내, 그녀의 왼쪽이 나의 처제. 두번째 사진에서 왼쪽의 첫번째가 이형승의 아내, 그녀의 옆이 이미경씨다. 아쉽게도 당시 ‘오디오문화공간’의 멤버들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1991년, 그해 여름

우리는 서울에서 단체로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서 나의 부모님 집 앞마당에서 삼겹살도 구워 먹기도 하며 놀다가 여자들은 1층, 남자들은 2층에서 잤다. 그 당시의 사진이나 영상을 하나도 남기지 않은 것이 무척이나 아쉽다. 나는 당시에 오디오문화공간의 간사하고 서로 약간 설레는 감정을 갖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런데 그때의 여행에는 그녀의 단짝 친구가 참여하면서 우리 둘 사이는 틀어졌다. 우리 일행은 그 다음 날 한국에서 최고 명산인 설악산으로 놀러갔다. 우리는 그 산에 있는 비룡폭포를 목표로 정해 등산을 했다. 그런데 폭포를 구경하고 내려 오는 도중에 비가 억수 같이 쏟아져 내려 그야말로 우중산행 (비오는 중의 산행)이 되었다. 우리 일행은 산을 내려오던 도중에 막걸리와 도토리묵, 파전 등을 파는 한 토속민속집에 들려서 다양한 파전 종류에 막걸리를 기분 좋게 마시면서 즐겁게 떠면서 놀았다.

사진 설명: 이 영화를 ‘오디오문화공간’에서 같이 봤던 기억이 난다. 이 영화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1990년 작품 “꿈”이다. 몽환적인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물레방아갓 장면이며 복숭아꽃이 만발한 장면이며 판타지처럼 그려진 분위기가 우중산행 당시의 우리 일행의 분위기와 매우 닮아 있었다. 1991년 여름의 우리의 여행은 몽환적이었다.

아, 그때의 분위기가 기억 난다. 물래방아에 연결된 원숭이 모형의 인형들이 북과 꽹과리를 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초등학교 언젠가 가족과 함께 설악산으로 여행을 갔을 때 느꼈던 정취와 똑 닮아 있었다. 당시에도 나는 그 상가를 들렸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10년이 지나도 좀처럼 변화지 않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흘러 아주 오래전의 어떤 장소를 가면 여전히 분위기도 비슷하게 유지되던 시절이었다. 그 식당 주변에의 작은 개울에는 물이 많이 불어 있었으므로 그곳으로부터 물을 유입해서 돌리던 물레방아가 매우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앉아서 흥겹게 떠들던 우리 주변 도처에는 물 흐르는 소리, 북과 꽹과리들의 소리, 우리 일행들이 질러대는 즐거운 소리가 넘쳐 났다.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듯한 몽환적 정취가 넘쳐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서 영화 “꿈”이 상기되었다.

우리는 도토리 묵과 파전과 막걸리 등 그곳의 향토 음식을 마음껏 즐긴 후 다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 갈 때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서 한치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마다 삼삼오오 혹은 한 두 명씩 그룹을 지어서 길을 찾아 내려가야 할 형국이었다. 우연하게도 나는 오디오문화공간의 간사 A의 친구인 B와 둘이서 함께 그 짚은 안개를 뚫으면서 걷게 되었다. 그녀는 짙은 속눈썹, 작고 예쁘장한 얼굴, 불그스레한 입술이 매력적이었다. 나는 B가 마음에 들었다. 그 짙은 안개 길에 우리 둘이 걷던 중 그녀가 돌에 걸려 넘어질뻔한 그녀를 내가 잡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는 그 여자의 손을 꼭 잡고 내려 올 기회가 생겼다. 우리들이 맞잡은 손에는 어느 새 땀이 흥건하게 배었다. 서로의 손을 통해 전달되는 야릇한 서로의 흥분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 같다. 짙은 안개 때문에 우리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며 간간히 여기저기에서 우리 일행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을 뿐이었다. 나뭇잎이 얼굴에 스치며 가볍게 때릴 칠 때마다 그녀가 질려 대는 외마디도 나에게는 깜찍하게도 아름다웠다. 가끔 그녀는 그녀의 발의 균형을 잃어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그녀의 몸을 나에게 내 맡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자그마한 그 여인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풋풋한 향기와 향수 냄새가 내 코를 살짝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점점 손에 힘을 주었으며 따뜻한 땀방울들은 우리의 손바닥에서 송글송글 맺혀 손 마디마디 사이로 흘러 안개 속으로 흩뿌려졌다. 그 우중산행은 지금도 내 인생에서 한 여인과 보낸, 가장 행복하고 들뜬 몽환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산을 다 내려 왔을 때 우리의 일행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B와 손잡고 안개를 뚫고 나타나자 A가 놀란 표정을 언뜻 본 것도 갔다. 그러나 나는 B와 같이 보낸 것은 그 하산 때가 순간이 유일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고 둘 만의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것으로 면도칼로 무를 자르듯 우리의 관계는 명확히 아무 사이가 아닌 것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그날 동해 해변에 가서 텐트를 치고 놀았다. 바다를 보고 노래를 부르고 별을 보고 시를 읊었다. 그때 나는 우중산행 속에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내려온 기분이 남아 있어서 약간 미열이 남아 있었다. 그런 나의 모습은 고스란히 A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우리들의 여행이 끝난 며칠 뒤, A가 나의 회사 근처에 찾아와서 길 위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녀는 내게 이별을 통보했다. 내가 사귀던 여성으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은 유일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가 내게 그 아픈 말을 하고 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방송 아나운서를 지망하던 여성인 까닭에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맑았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기품이 서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슬펐다. 왜냐하면 나는 두 명의 여성을 동시에 잃었기 때문이었다. A와 나는 이제 막 설레는 마음을 갖고 사귀기 시작하던 때였으므로 아마도 데이트는 두어 번 정도 밖에 하지 못했을 시기였을 것이다. 따라서 서로 간에 이별 그 자체가 갖는 슬픔은 깊지 않았다. 그녀는 자그마한 키였지만, 얼굴이 지적이면서 좋은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당시에 나는 나의 욕심으로 인하여 그녀가 입었을 상처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도 방배동의 내가 다니던 그 회사 건너편 인도에서 그녀와 나누던 이야기가 희미하지만 부끄럽게 기억난다.

IMG_20180105_0004.jpg

사진 설명: 필름에 기록된 날짜가 1993년 1월 24일이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이며, 당시에 아버지는 68세, 어머니는 59세셨다. 내가 안고 있는 사내 아이는 나의 여동생의 아들인 함형석이다. 나의 부모님 집은 뒤에 보듯이 당시에 저렇게 생겼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이 공간에 너무나 많은 추억이 남아 있다. 눈이 많이 내렸는지 사진의 왼쪽편에 과일나무들의 가지가 곳곳에 부러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진은 내 여동생이 찍은 것이라고 조금 전에 나에게 알려 왔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도중에 누가 이 사진을 찍었는지 궁금해서 그녀에게 물었던 것이다. 나는 어디를 가나 늘 카메라나 비디오카메라를 갖고 다녔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록을 했다.

그 때 함께 여행을 했던 사람들 중에서 지금도 소식을 주고 받는 사람은 형승이와 영훈이, 이종국 선배 뿐이다. 내가 미국에 온 이후에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러서 한국에서 나와 함께 추억을 공유했던 많은 사람들과 소식이 끊겼다. 나보다 미국에 먼저 이민을 와서 생활하고 있는 이종국 선배는 자주 만나는 사이다. 워싱턴에 살고 있는 이 선배와 둘이 있을 때, “1991년 그 해 여름의 우중산행”을 가끔 떠올리곤 한다. 당시 여행 멤버 중에 이 선배는 “오디오문화공간”의 멤버는 아니었지만 내가 권해서 그 해 여행에 동참했다. 프랑스 유학을 준비 중이었던 한 여성과 눈이 맞아 서로 설레던 이야기를 이 선배는 떠올리곤 했다. 아, 그 아가씨는 참 분위기가 있었다. 선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라시대 선화공주와 같은 선하고 고운 이미지였다. 두 사람은 끝내 인연이 안되었다. 왜, 당시에는 이메일이나 휴대폰 같은 게 없었는지 생각해 보면 아쉬운 게 많다. 서로 간단하게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수단이 마땅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 선배는 한 참 후에, 프랑스 유학 경험을 한 다른 여성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으니 아이러니다. 나 역시 그곳의 멤버였던 영훈이의 소개로 1994년 10월에 내 아내를 만났다. 1991년 가을에 “오디오문화공간”이 재정문제로 문을 닫고 나자, 우리들은 동숭동 대학로로 자리를 옮겨 스터디 그룹을 이어갔다. 나는 당시에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그 문화공간이 문을 닫은 시점이 내가 그곳의 간사 여성과 헤어지고 얼마되지 않을 때였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별을 한 이후에 내가 그곳을 방문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A를 한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간사는 그 회사의 사장과 특수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그곳의 사장님의 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와 이별을 하면서 상심한 그녀는 그 문화공간을 더 이상 운영하지 않기로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여행 직후에 곧바로 문을 닫았으므로 어쩌면 그 회사의 재정 문제는 그냥 표면적인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그해 여름은 이렇게 달콤쌉싸름하게 새겨져 있다.

업데이트: 2019년 11월 22일

엊그제 형승이를 분당에서 밤늦게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와 대화 중에 그 당시에 찍은 사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나는 설레어졌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형승이가 나에게 사진 몇장을 보내왔다.

뒷줄 왼쪽부터: 이종혁, 나, 이상모, B, A, 이미경. 아랫줄 왼쪽부터: 영동, 형승, 상엽, 승현 누나,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 설명: 내가 받은 사진은 달랑 세장이었지만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있어서 감개무량하다. 그런데 사진을 보니 나의 기억은 상당히 왜곡 혹은 잘못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우선, 사진 속에 나온 인물들은 내가 이글 앞에서 그 당시 여행에 참석한 사람들을 소개한 것과 많은 차이가 난단느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빼먹은 사람들이 사진 속에서 4명이나 나온다. 심지어 나는 당시에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정도이다. 이처럼 우리의 기억이란 일부만 맞고 일부는 틀리거나 왜곡될 수 있다. 완벽한 기억이란 애당초 우리의 뇌구조상 불가능하다. 뇌에 어떤 사건이 저장되었더라도 본능적으로 생존과 밀접한 것을 중심으로 선별적으로 저장하는 방식일 수 있다. 단 한 장의 사진에는 앵글에 잡힌 모든 것들이 왜곡없이 저장될 수 있는데, 그것이 우리의 뇌의 저장 메커니즘과 다른 이유이다.

뒷줄 왼쪽부터: 이종국, 영동, B, 모름, 상엽, 형승
앞줄 왼쪽부터: 승현, 미경, A, 모름, 나, 이종혁

업데이트: 2019년 11월 25일

어제 형승와 그의 친구 상엽을 분당에서 만나 저녁 겸 술 한 잔을 가볍게 했다. 그러니까 위의 사진 속에는 상엽이가 있었다. 그리고 사진에는 3명의 미지의 여인들이 더 있는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잘 기억하지 못하는 오디오문화공간의 멤버이거나 멤버들의 친구들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문화공간서울’로 생각했었는데 어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오디오문화공간’이어서 나의 글에서 모두 수정했다. 오디오사업을 하는 회사가 설립한 것이었으니 그 이름이 적당했겠다. 당시에는 ‘영화공간 1895’ 등 멋진 이름을 가진 언더그라운드 영화 클럽들이 있어서 나는 우리 모임 이름이 약간 촌스럽다는 생각했었다. 당시에 언더그라운드 영화 써클들이 여기저기 탄생하던 시절이었다. 한국의 대학교들에도 연극영화학과라는 학과들이 있었지만 주로 방송이나 연극에서 활동하려는 배우 지망생들이 많았으며 영화연출이론 등 영화 창작 예술과는 다소 거리가 먼 상태였다. 그래서 대학교 바깥에서의 시네마떼끄 운동이 더욱 한창일 때였다. 원래 시네마떼끄는 1935년에 Henri Langlois and Georges Franju 사람이 영화 클럽 “Cercle du cinéma”을 만들어서 희귀본 영화 필름을 보관하는 운동을 펼치고 1936년에 시네마떼끄 프랑스(Cinémathèque Française)라는 단체를 만들면서 유래한 용어이다. 후에는 영화 클럽과 같은 영화인 활동 등을 총칭하게 되었다.

원래 인간은 기억하고픈 것만 기억하는 것 같다. 어제는 형승의 친구 영동이하고는 재회하지 못했지만 그와 전화 통화를 했다. 28년 전, 그러니까 1991년의 추억 속으로 나는 잠시나마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오늘 십대부터 친구인 권순욱과 저녁을 하러 옛날 염천동 다리 근처에 있던 옛 종로학원쪽으로 걸어갔다. 나에게 아주 뜻 깊은 종로학원은 이제 빈 부지로만 남아 있었다. 세상은 정신없이 변해 가고 우리들의 추억은 흐릿해져만 간다. 그리곤 때론 영영 사라져 가기도 한다.

업데이트: 2021년 8월 17일
나는 형승이로부터 전달 받은 3장의 사진을 그 무렵에 이종국 선배에게 보냈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해변가의 밤에 서로 마음을 주고 받던 여성이 사진에 있는지 그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는 내가 안개낀 산길을 손 잡고 내려 왔던 “B”를 지칭했었다. 나는 그 당시에 그가 뭔가 착각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웃어 넘겼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영어로 옮기기 위해서 정리를 하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묘사를 했던것처럼 나의 감정처럼 B가 나에게 호의적이었다면 그날밤 해변에서도 나와 어떤 방식으로든 시간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하산을 한 이후에 우리는 예전처럼 서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 있었다. 따라서 이종국 선배가 그날 밤 B와 썸을 탔는지는 나는 모른다. 사진을 보고 그가 지칭을 했으므로 그의 주장이 맞을 것 같다.

wusukkang
  • wusukkang

One Pingback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