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만나다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어디로 드라이브나 가자”고 아내가 말했다. 나는 펜실베니아의 대표적인 건축물의 하나인 낙수(Fallingwater)를 가볼까 해서 검색을 해 보니 교통이 막히지 않을 때, 우리 집에서 쉬지 않고 5시간 30분을 넘게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 폴링워터 즉, 낙수라는 의미의 이 건축물은 20세기 기념비적인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1867년에 출생한 프랭크 로이드 롸이트(Frank Lloyd Wright)라는 미국의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이며 작가이자 교육가로서 뉴욕시의 맨해튼 5 에비뉴와 이스트 89 스트리트에 있는 구겐하임박물관을 비롯해서 91세로 세상을 떠나기전까지 무려 800 여개의 건축물을 남긴 전설적인 건축가이다. 그중에서 유네스코(UNESCO)가 이 폴링워터 건물을 포함해서 8개를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했다. 그러므로 이 건축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셈이다. 내가 사는 집 근처에도 이 건축물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집이 있어서 알아보니 롸이트 밑에서 일을 한 건축가가 설계한 집이라고 한다. 그렇듯이 이 사람이 현대 미국 건축에 큰 영향을 준 것은 틀림이 없다.

Source: https://fallingwater.org/

그런데 펜실베니아주의 관광을 홍보하는 Visitpa.com에서 펜실베니아주를 대표하는 유명한 건축물 중 첫 손에 꼽은 곳이 바로 오늘 내가 방문한 도열스타운(Doylestown)에 있는 더 머서 마일(The Mercer Mile)이다. 우리 집에서 폴링워터까지의 거리가 560킬로미터인데 서울에서 부산의 거리가 325킬로미터인 것에 비춰봤을 때 너무 먼 거리다. 중간에 쉬면서 가려면 7~8시간은 걸린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토요일 새벽에 두 녀석을 차에 태우고 달려서 피츠버그(Pittsburgh)를 간 적이 있었다. 폴링워터보다 약간 먼 곳이다. 도중에 속도위반으로 티켓도 받았지만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저녁 시간에 출발해서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자정을 한참 넘겨서 도착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에너지가 넘칠 때였다. 나는 1시간 40분 가량 소요되는 이곳을 선정하고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출발할 때, 위의 리스트만 보고 박물관 주소만 네비게이션에 입력하고 출발을 했으므로 내가 알고 있는 추가 정보는 전혀 없었다. 내가 낯선 곳으로 한참을 가니까 아내가 어디를 가느냐고 내게 물었다. 내가 도착해 보면 알게 될 거라고 대답했지만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는 눈치였다. 고속도로를 빠져 나간 후 우리 차는 뉴저지주 접경 지역을 지나 펜실베니아의 한 시골 지역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펜실베니아주는 ‘다른 곳에서의 내 삶’이라는 사이트에서 한국과 면적을 비교해 보면, 한국보다 1.2배(즉, 20% 가량) 더 크다. 2021년에 발표한 인구센서스국의 조사에 의하면, 2020년 기준으로 13,011,844명이 살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펜실베니아에 큰 호감이 없는데 특별한 색깔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첫 연방의 수도였던 필라델피아 (158만 명)가 제일 큰 도시이고 두번째가 피츠버그 (30만 명), 앨른턴(Allentown, 12만)가 10만은 넘는 도시일 뿐이다. 이 외에도 약 4만명이 넘는 도시가 17개 뿐이며 나머지는 시골이다. 2010년 기준으로 시골(농촌, rural이라 표현한다)의 인구가 21%인 2백 6십만 명에 달한다. 이에 반해 뉴저지의 농촌 인구는 뉴저지 전체 인구의 4.49%(뉴저지 보건부)에 불과하다. 미국 전체적으로는 시골 지역의 인구는 9.7%이다. 그런데 Stacker.com에 따르면, 미국의 주중에서 가장 시골 인구가 많은 주가 메인주로 2010년 기준으로 61.3%라고 한다. 이 조사에 따르면 펜실베니아는 32번째로 시골 지역 인구가 많은 곳으로서 2010년 기준으로 21.3%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이 시골 지역의 면적은 펜실베니아주 전체 면적의 89.5%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처럼 조사에 따라서, 그리고 그 시골(Rual Area)기준, 조사 기준 년도에 따라서 다소 다르다. 미국의 인구조사국의 자료가 가장 정확하다. 센서스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미국은 거의 6천만 명이 농촌 지역에 살고 있으며 그것은 전체 인구의 19%에 이른다고 한다. 아래는 인구조사국에서 시골(농촌)의 정의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다. 아래 지도에서 녹색 부분이 시골(농촌)을 표시한 것이다.

The Rural Definition
For the average American, rural is an abstract concept of rolling hills and farmland rather than a concrete definition. Thus, it can be a difficult task trying to define the term “rural” and an even harder task trying to explain it.

The Census Bureau defines rural as any population, housing, or territory NOT in an urban area. The green area on the map to the right represents all the area in the United States that is classified as rural based on this definition.

The Census Bureau’s rural definition is closely tied to the urban definition. To fully understand the Census Bureau’s concept of rural, you need to first understand how the Census Bureau defines and delineates urban areas.

보통 미국인들에게 농촌은 구체적인 정의가 아니라 구릉과 농지의 추상적 개념입니다. 따라서 “농촌”이라는 용어를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 될 수 있으며 이를 설명하는 것은 더 어려운 작업이 될 수 있습니다. 인구조사국은 농촌을 도시 지역이 아닌 인구, 주택 또는 영토로 정의합니다. 오른쪽 지도의 녹색 영역은 이 정의에 따라 시골로 분류된 미국의 모든 지역을 나타냅니다. 인구조사국의 농촌의 정의는 도시의 정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인구조사국의 농촌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먼저 인구조사국이 도시 지역을 정의하고 묘사하는 방법을 이해해야 합니다.

펜실베니아의 농촌 지역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는다. 이 주에서 가장 큰 높은 지대가 마운트 대비스라는 곳인데 1천 미터도 안된다. 그냥 주 전체가 어디를 가나 평평한 평야 지대라고 보면 될 정도여서 대규모 농사를 짓는데는 적격이다. 그래서 농촌지역은 아무래도 대부분 보수적일 수 밖에 없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 때마다 농촌 지역 사람들은 대게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는 경향이 높다. 도시 지역은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한 반면에 농촌 지역은 인구의 교류가 도시지역에 비해 느릴 수 밖에 없으므로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따라서 농촌 지역 사람들이 도시인에 비해 외부 변화에 둔감하여 조금 답답한 면은 있지만, 그만큰 사람들은 순박하다. 우리가 방문했던 벅스카운티의 도열스타운은 뉴저지와 주경계를 한 곳으로 농촌지역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Signs (2002)

맬 깁슨과 조아퀸 포닉스, 로리 컬킨이 주연을 한 2002년 영화 사인(Signs)은 이 마을에서 모두 촬영되었다.

도열스타운에 들어서서 시내를 한바퀴 돌아보니 관광지가 아닌가 할 정도로 활기가 넘쳐 보인다. 흑인들은 구경을 하지 못할 정도이고 나와 같은 아시안도 없어서 우리가 걸어가면 꼬맹이들은 신기하게 쳐다보곤 한다. 그 아이들에게 우리와 같은 아시안을 구경하는 게 난생 처음일 것이다. 위키페디아에 따르면, 도열스타운의 인구 중 94.8%가 백인이며 흑인은 2.3%, 미국 원주민은 0.2%, 아시안은 1.9% 등으로 매우 소수이다.

정감이 가는 타운이다. 도시 한가운데에 미국 국기인 성조기 아래에 걸린 깃발은 LGBTQ를 상징한다. 즉, 동성애, 양성애, 성전환자 등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상징하는 깃발인데 시의 가장 큰 거리에 걸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진보적인 도시이다. 이런 곳에서는 아시안이라도 혹시나 인종적인 차별이나 모욕을 당할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중고서점에서 존 그리샴의 2016년도 작품 “The Whistler”를 1달러를 주고 샀다.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면 아직도 서점이 남아 있는 곳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중고서점을 만나면 즐거워진다.

펄벅(Pearl Buck in 1932) 대지(The Good Earth) 출판 당시의 사진. Source: 위키페디아

이 타운의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8,270명 정도로 작은 곳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유명인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바로 소설 “대지”로 널리 알려진 펄벅(Pearl S. Buck) 여사가 이 타운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글을 쓰고 자녀를 키우던 집이 아직도 남아 있다. 펄벅 여사는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여성 작가 중 한 명일 것이다. 1892년 6월 26일에 버지니아에서 태어난 펄벅 여사는 불과 5달 후에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성장하였다. 그것이 그녀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11년에 미국 대학에 입학해 1914년에 최우수성적(Phi Beta Kappa)으로 졸업한 펄벅은 중국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중병이라는 소식을 받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중국에서 농업경제학자인 존 벅과 결혼한 후 국립중앙대학인 진링대학과 사립대학인 난징대학 등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그녀는 도중에 1924년에 코넬대학에서 석사학위를 한후 중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난징학살의 시기에 가족이 거의 몰살 당할뻔한 경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 일본에서 살면서 일본인들이 모두가 군국주의자가 아니라는 경험, 장애를 안고 태어난 딸을 키우면서 경험한 그녀의 삶 등이 펄벅을 본격적으로 작가로서 활동하게 된 동인이 되었다. 1934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펄벅은 그후 중국에 헐로 남은 남편과 그 이듬해 이혼 한 후 뉴욕의 출판 편집자인 리차드 웰시와 결혼 후 아이들을 키우며 이 타운에서 40년 가까이 살았다.

1932년에 소설 3부작으로 발표한 대지로 193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이는 미국 여성작가로는 최초의 일이며, 이에 앞서 1932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한국에도 펄벅재단이 운영되고 있는데 그곳을 통해서 펄벅 여사를 기리는 재단이 왜 한국에 있는지 알 수 있다. 그곳 재단에서는 설립목적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출생으로 인하여 불이익이나 편견, 차별 없이 어린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교육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

피부색, 언어, 출생지, 사회적 신분 등이 더 이상 차별의 이유가 되지 않는 정의 사회구현 및 아동인권이 존중되는 사회구축에 앞장선다.

인종과 국적을 뛰어넘어 인간존중과 사랑을 실천한 펄벅 여사의 정신을 계승하여 아름다운 다문화사회 구축을 위한 교육 및 연구, 대국민 인식개선에 주력한다.

그녀가 68세 되던 해에 1960년에 처음 한국을 방문한 후, 1969년까지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애정을 나타낸 그녀는 “6.25 수난을 그린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 (The Living Reed, 살아 있는 갈대), 1963″와 한국의 혼혈아를 소재로 “새해 (The New Year), 1968” 등을 발표했다. 그녀가 한국에서 고아원을 방문하고 실의에 빠져 있는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보여준 인류애를 실현하기 위해 1964년에 한국에 펄벅재단 지부를 설립했다. 물론, 펄벅 여사는 1949년에 입양기관인 “웰컴하우스 Welcome House)”를 설립했고 펄벅 재단도 설립했다. 그녀 스스로가 자녀를 입양해서 양육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한국에 재단을 설립한 이후, 일본, 대만, 필리핀, 태국, 베트남에 지부를 설립했다.

Pearl S. Buck House - Pearl S Buck

펄벅 여사가 40년 가까이 살았다는 집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번에 방문하지 못했다.

Source: perlsbuck.org

이 타운에 도착하자마자 점심 식사를 먼저한 후, 이 박물관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어갔다. 이 지역 출신으로 1948년에 퓰리쳐상과 1977년에 대통령자유메달을 수상한 소설가인 제임스 미쳐너(James A. Michener)를 기리는 박물관이었다.

자그마한 뮤지엄인데 이 소설가가 기증한 자료와 예술품들, 그리고 이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실내외에 함께 전시되어 있다. 잠깐 쉬어 갈 수 있는 아담한 곳이다.

기증 작가를 기리는 이 박물관에는 일본 건축가의 작품도 있는데 꽤나 유명한 사람 같다. 그러고보면 건축가 중에 일본인들이 꽤나 많다. 프리츠커상(Pritzker Award)는 건축분야의 노벨상이라고 부르는데 이 상을 수상한 일본인 건축가는 8명이나 된다. 1979년에 첫 수상자를 발표한 이래 2021년까지 43년 동안 매년 수상자를 발표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한국에서 이 건축노벨상을 받은 건축가가 없다. 그만큼 일본의 건축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을 증빙한다. 하필이면 왜 일본 예술가의 작품이 있나보니 이 박물관의 주인공인 제임스 미쳐너씨의 부인은 콜로라도 출생으로 일본인-미국인(Japanese American)이었다.

이 뮤지엄의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이 이 타운에서 가장 방문해야 할 첫번째에 꼽히는 Mercer Museum and Library이다. 2016년이 100주년 기념이었으니 오래된 곳이다.

우리는 이곳을 패스하고 바로 폰트일 캣슬로 갔다. 이 성과 관련한 스토리는 지금으로부터 165년 전인 1856년 6월 24일에 이 타운에서 출생한 헨리 머스(Henry Chapman Merce)로부터 시작되었다. 미혼인 채 1930년에 7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3개의 아름다운 건물과 멋진 이야기를 남겼다. 그것이 바로 그가 1908년부터 1912년에 지은 폰트일 캣슬(Fonthill Castle)과 50,000개의 예술품을 전시하고 있는 머서박물관(Mercer Museum)과 건물을 짓는데 이용할 타일을 생산하기 위해 만든 더 타일웍스(The tileworks)다.

Fonthill Castle / Source: https://www.visitbuckscounty.com/things-to-do/planning-ideas/the-mercer-mile/

구글의 위성 지도로 보면 폰트힐 캣슬이 위치한 곳이 저렇게 크다. 위의 사진은 구글 자동차로 찍은 옆면이다.

Merce Museum / Source: https://www.visitbuckscounty.com/things-to-do/planning-ideas/the-mercer-mile/

The Tileworks / Source: https://www.visitbuckscounty.com/things-to-do/planning-ideas/the-mercer-mile/

오늘 우리는 폰트일 캣슬(Fonthill Castle) 투어를 했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오후 4시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약 8명 정도의 그룹이 매 15분마다 투어에 나설 정도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우리는 약 30분 정도 남는 시간을 활용해서 근처에 있는 타일공장을 찾았다.

예술 작품과 같은 수준 높은 타일을 생산하는 공장이 폰트일 캣슬 근처에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타일 학습과 생산, 견학 등이 이어져 오고 있다.

드디어 Fonthill Castle 투어에 나섰다.

총 44개의 방에는 침실 10개와 벽날로만 18개에 창문이 자그마치 200여개라고 한다. 이것을 직접 설계하고 지은 사람이 바로 오늘 이 글의 주인공 핸리 머서다. 바닥과 벽, 천장 등에 타일을 만들어서 입혔는데 모두 다 어떤 이야기를 담기위해 세심하게 만들었다. 방과 복도를 비롯하여 어떤 방이나 공간에 아무 의미없이 만든 곳이 없다. 철저하게 자신의 철학을 구현한 것이 인상 깊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하버드에서 인류학을 공부한 후 유펜의 로스쿨을 마친 그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으나 1881년부터 1889년 동안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을 여행한 것이 그의 인생관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에 대한 위키페디아의 소개를 보면, 세라믹 타일 제작과 엔지니어링과 건축, 그리고 고고학에서부터 도자기 등에 관해 광범위한 글을 썼다고 한다. 그가 제작한 세라믹 타일은 펜실베니아 주의회 의사당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설치되었는데 타일 장식을 통해서 스토리를 나타내는데 집중했다. 그래서 이곳의 집에도 곳곳에 타일들은 예술가의 생각이 구현되어 있다. 당시에 글로벌 문화에 대한 세계관을 나타내기 위해 동양의 문화에 대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그룹에는 우리를 포함해서 7명이 있었는데 모두 뉴저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중에 꼬맹이들을 데리고 온 아빠도 있었는데 이렇게 그룹에 꼬맹이들이 있으면 가이드를 맡은 사람은 보다 흥미롭게 설명을 할 수가 있다. 아이들의 반응이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건물의 곳곳에 건축가이자 작가이자 디자이너이자 타일 제작자인 주인공의 손길에 미치지 않은 영역이 없다. 동서고금의 전설이며 설화, 문화와 역사를 담아내고 있었다.

이 사진은 열쇠를 넣어 두는 곳이다. 내가 세어보니 열쇠를 넣어 두는 곳이 가로 6개, 세로 11개가 있는데 5군데를 제외하고 보관함마다 모두 이름이 씌여 있었다. 그러므로 열쇠만 무려 61개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열쇠함 이름을 보면, 아침을 먹는 식당(Breakfast Room)도 있고 연구방(Study), 뒷도서관(Back Library), 살롱(Saloon), 흡연실(Smoking Room)도 있다.

핸리 머서는 이 집에서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도자기 타일을 이용해서 집 안의 공간에 맞춰서 서사적인 이야기를 구성한 그는 진정한 예술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건축물의 기본은 콘크리트와 철골을 사용해서 튼튼하게 짓되 내부 공간은 어디 하나 닮은 곳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다. 계단의 구성, 골목, 방들 모두 각자의 개성과 멋을 갖고 있었다. 침실에는 적당한 위치에 외부의 빛이 투과되도록 배치했고 통풍과 욕실, 그리고 내부 공간의 흐름을 배려해서 만들었다.

중국이나 이란 등의 문화 요소들도 배치하면서 글로벌 가치관을 가진 핸리의 생각들이 스며들어 있다.

당시에 전화기는 매우 귀했을텐데 이 집에서 이런 전화기가 여러 곳에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핸리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필라델피아에 사는 위의 여인과 연인 관계로 지냈다고 한다. 이 방은 그녀가 이 성을 방문할 때 사용했다고 한다.

일종의 선룸인 이곳은 얼마나 정취가 있던지!

우리가 투어를 끝냈을 때, 신혼 사진을 찍기로 예약된 팀들이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곳은 워낙 멋지기 때문에 이런 행사에 공간을 대여해 주고 있었다. 내 스마트폰 카메라는 이렇게 멀리 있어도 가깝게 찍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 사내가 이곳의 세상을 직접 설계하고 만든 후, 세상을 떠난지 거의 100년(1930년 3월 9일) 가까이 지났지만, 그가 떠난 이후에도 이곳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하려는 커플뿐만이 아니라 그의 삶에 영감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세상에 왔다가 세상과 작별을 해야 하는 우리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의 발자취를 통해서 무슨 영감을 얻을 것인가? 나의 삶은 도대체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물음이 집으로 오는 내내 나를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