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단절된 27시간

집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없으니 생활 리듬이 깨진다. 그리고 오후 늦게는 서너 시간의 잠도 잤다. 인터넷이 끊어진 후 아예 컴퓨터를 열지 않다가 처음으로 켰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의 습관처럼 워드를 띄워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랬다. 소위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우리의 하루 패턴이 어땠었는지를 잊은지 아주 오래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1) PC통신시대의 시작되기 전과 (2) PC통신 시대, 그리고 (3) PC통신과 인터넷의 공용시대와 (4) 인터넷 시대 정도로 나눌 수 있겠다. 인터넷 시대도 (4-1) 유선 인터넷과 (4-1) 무선 인터넷으로 나눌 수 있겠다. 무선 인터넷은 사실상 모바일의 일상화로 그 영역이 복잡해졌다. 따라서 (5) 유선 인터넷 사용자와 (6) 무선 인터넷 사용자로 구분되기 시작했고 무선 인터넷은 다시 스타링크와 같은 새로운 (7) 초고속 위성 인터넷이 시작되면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다.

문제는 내가 사는 집에서는 모바일 신호가 매우 약해서 유선 인터넷이 끊기면 세상과 단절된다는 점이다. 불과 100~200미터만 벗어나면 5G 신호조차 제대로 잡히지만, 우리 집에서는 평소에 전화 통화하기도 매우 힘들 정도로 사각지대이다. 모바일 무선 회사들이 중계 안테나를 더 세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불편이 많다. 한국에서라면 생각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다. 모름지기 내가 사는 동네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 블록인 뉴욕메트로폴리탄에 포함되어 있는 지역인데도 2021년에 5G 모바일기기를 사용하면서도 전화 통화 품질로 애를 먹어야 한다는 게 말이 아니다.

그래서 유선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하는 오늘과 같은 날, 나는 세상으로부터 거의 차단을 당한다. 오늘의 일은 내 스스로가 만든, 무지해서 일어난 일이다. 작년에 고맙게도 버라이존에서 우리 지역에도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 전에는 그 회사에서는 ADSL(PC 통신시절부터 운영하던) 서비스만 제공되고 있었으며 뉴욕 인근에서 유선 인터넷 망 사업을 하는 스펙트럼이라는 회사를 통해서 품질이 그다지 좋지 못한 서비스를 받아왔었다. 한적한 주택가라 투자수익이 나오지 않으니 좋은 시설을 갖출 필요가 없는 것이다.

드디어 버라이존이 우리 지역에도 인터넷을 제공하면서 나는 빠른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모뎀의 위치를 페밀리룸에 설치했었는데 당시에는 고등학생인 나의 아들을 위해서 그 자리로 잡았다. 그 룸 바로 위가 아들의 방이기 때문에 가장 빠른 5G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는 구글에서 만들어 판매하는 구글 모뎀을 4개를 사용해서 지하에서부터 2층까지 꽤 넓은 면적에서도 불편함이 없이 WiFi를 이용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 나는 여러 대의 보안 카메라와 각 층마다 설치된 유독 가스 탐지 장치, 에어컨에서부터 보일러까지 통제를 하는 온도계와 Nest 장치들, 거기에다 창문마다 설치된 커튼 통제, 차고문 통제, 앞과 뒷뜰의 잔디 등에 물을 공급하는 기기 등을 통제하고 있다. 한마디로 인터넷이 없으면 집은 거의 원시적인 상태가 된다. 물론, 전기만 공급되면 그래도 기본적인 것은 운영이 가능하지만, 휴대폰으로 직접적인 통제는 불가능해 진다.

우리 집에 그동안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리빙룸에 내가 사용하던 책상을 내려다 놨다. 나는 최근에 일어서서도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는 책상을 주문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내가 그동안 서재에서 사용하던 책상 등을 리빙룸에 내려 놓았다. 아마도 한국에서 아내가 돌아오면 반대를 할 것 같지만, 그녀의 부재중에 일단 저질렀다.

이 리빙룸은 마치 식물원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열대성 식물들이 제법 많다. 그동안 사용하지 않는 방이다보니 이곳에 자연스럽게 모아 놓았다. 보기만 해도 산소 공급이 밤에는 엄청 날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 집에는 그동안 페밀리룸에 인터넷 기본 모뎀이 설치되어 있어서 그 방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나의 서재는 5G 서비스를 제대로 이용할 수가 없었다. 이제 아이들 위주의 구조를 바꿀 때가 된 것이다. 그들이 집에 온다고 해도 연중 아주 짧은 기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나와 아내 위주로 모든 구조를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기본 모뎀의 위치를 페밀리룸에서 리빙룸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어떻게 하면 버라이존의 서비스를 받지 않고 내 스스로가 할 수 있을지 연구를 했다. 유선은 지하실에 설치된 장치를 통해서 거의 반대편까지 선을 끌어서 1층의 바닥을 뚫고 선을 연결한 것이다. 가장 난해한 작업은 보일러실에서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매우 비좁은 공간으로 선을 끌어다가 정확하게 리빙룸의 원하는 위치에 구멍을 뚫고 선을 연결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분야에 전혀 경험이 없지만,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인지라 연구를 하면 답이 나온다. 나는 자로 측량한 정확한 위치에 선을 끌어 올릴 수 있게 드릴로 구멍을 뚫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페밀리룸에 있는 선을 자를 때 잠시 망설였다. 요즘은 광케이블인데 나는 광케이블을 한 번도 연결하는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 케이블의 헤드를 잘 살펴보니 모두 기존에 내가 경험했던 인터넷 선과 다름없는 구리선들이 꼽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1미터만 남기고 과감하게 잘라 버렸다. 그 자른 선을 새로운 구멍에 끌어 올리는 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했다.

이제 간단하게 내가 끊은 선을 이어 붙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선가닥이 12개 정도되었지만, 광케이블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한쪽에는 광케이블 같은 부드러운 실가닥들이 있었지만, 다른 쪽 선에는 전혀 그런 것이 없어서 나는 보이는 구리선들만 연결했다. 그리고 모뎀에 연결해서 신호가 잡히기를 기다렸다. 결과적으로 신호는 잡히지만, 인터넷 서비스는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아마도 머리카락보다 더 가느다란 실들이 어딘가에 연결이 되었어야 했다는 것을 나는 깨닫았다. 이미 늦은 뒤였다. 사실 내가 선을 자르기 전에 잠시 고민했던 것은 이런 일을 예상해서 였다. 선을 자르지 말고 그대로 사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무로 된 마룻바닥에 기존보다 2배 정도로 큰 구멍을 뚫어야 케이블의 헤드가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피하고자 했다.

오전 열 시 반 정도에 일어난 일 때문에 나는 차를 타고 모바일 신호가 잘 잡히는 지역으로 이동해서 서비스 센터에 연결했다. 요즘은 고객지원센터가 모두 채팅으로 이뤄진다. 전화번호도 없고 이메일 같은 서비스는 사용하지도 않는다. 모두 인력을 줄이고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목적이다. 실제로 채팅 로봇은 기본적인 일들을 사람들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처리한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에는 물리적으로 서비스 맨이 와야 가능한 일이라서 나는 사람과의 대화를 요청했다. 내가 분명하게 설명을 했음에도 매일 틀에 박힌 업무 처리에 익숙한 고객 지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테스트를 해 보겠다고 우긴다. 물론, 같은 채팅 대화방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나는 선을 내가 끊었으므로 테스트는 의미가 없다고 얘기했지만, 그녀는 나의 휴대폰 카메라 연결을 원했다. 카메라로 상태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집에서는 모바일 신호가 약해서 현재는 집 바깥에 있다면서 집에 돌아가면 대화를 나눌 수 없다고 얘기했지만, 그 사람은 고집스럽게 카메라 링크를 보내왔다. 내가 승인을 하니 대화창과 별개로 카메라에는 내가 차 안에 있는 모습이 잡히기 시작했다. 나는 할 수 없이 그 상태로 집에 돌아갔다. 물론 그 과정을 모두 그녀는 쳐다보고 있을 터였다. 당연히 내가 집에 들어가니 모바일 신호가 약해서 그녀와의 연결이 끊어진 상태였다. 나는 다시 이전의 자리로 차를 몰고 나와서 인공지능 채팅로봇과 대화를 하고 내가 전에 대화를 했던 “Joy”라는 여자를 찾으니 대화방이 닫혔다. 내가 무슨 성희롱을 하러 채팅을 하려는 사람으로 판단한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해할 수 있다. 그 와중에 버라이존 로그인은 아무리 올바른 정보를 입력해도 잘 되지 않아서 시간을 허비했다. 실제 그 이전에도 로그인은 나를 괴롭혔다. 참으로 한심한 회사 서비스다. 그렇게 어마무시하게 덩치가 큰 회사라도 디테일에는 허점이 많다. 겨우 인공지능에서 사람과 다시 대화를 하게 되었다. 다시 설명을 하려고 하니, 내 레코드가 있는지 상황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테크니션도 이 대화방에 참여를 하고 있으니 원격으로 테스트를 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물론 허락을 했지만, 다시 분명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내가 사고로 모뎀에 연결된 선을 칼로 잘라서 다시 연결을 했지만, 인터넷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당신네 서비스 퍼슨이 와서 고쳐야 한다고 분명하게 설명했다. 그랬더니 나보고 새로운 케이블은 준비가 되었냐고 묻는다. 나는 모뎀에서 한 10 인치 정도를 잘랐고 선은 여유분이 충분해서 새로운 케이블이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잘되었다며 그 새로운 케이블로 연결을 해 보겠느냐고 묻는다. 참으로 가관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사람을 보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나는 부연 설명을 통해서 케이블 헤드가 없으니 어떻게 연결을 하겠느냐고 되 물었다. 아무튼, 상황을 충분히 인지한 그들은 시간을 달라고 했다. 10여분을 기다린 후에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 대단히 미안하다며 기다려 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지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랬더니 대화창이 닫혔다. 아니, 사람은 언제 보내는지 스케쥴을 알려 주는 게 가장 중요한데 그것도 없이 일방적으로 나가버리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참으로 황당했다. 나는 다시 대화창 연결을 시도했다. 이번에도 로그인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후에 쳇로봇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나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랬더니 지금 대화하고 있다고 했다. 사람이었다.

나는 다시 설명을 했다. 그랬더니 서비스맨이 내 주소로 갈 거라면서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한 뒤에 다시 대화창이 닫혔다. 참으로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언제 사람이 올까 기다렸다. 물론, 기대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밖에 나가기 위해 초인종 위에 메모를 남겨 놨다. 다시 돌아오니 역시 서비스맨은 오지 않았다. 아침부터 에너지를 빼앗긴 탓에 피로감이 몰려와서 침대에 누웠다. 서너 시간을 잔 것 같다. 이미 사방이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인근의 한인 마켓에 들려 생각보다 많은 장을 봐서 돌아왔다. 그리고 저녁으로 사온 생 고등어를 구워 먹었다. 고등어를 구워 먹을 때 냄새 때문에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렇지만,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냄새가 전혀 나지 않고 전혀 타지도 않는 방법 말이다. 그런 식으로 어떤 생선을 구워도 마찬가지로 냄새, 연기가 아무것도 없는 방법이 있다.

나는 일런 머스크의 스페이스엑스가 제공하는 스타링크 서비스로 갈아탈까 생각 중이었다. 그렇지만, 보다 싸면서 서비스도 안정적인 버라이존이 낫다고 판단해서 서비스 신청은 아직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스타링크로 갈아타야겠다는 생각이 난다. 스타링크는 위성 인터넷이다. 집에 접시 안테나만 잘 설치해 두면, 안정적으로 초고속 서비스를 받아 볼 수 있다. 지저분하게 집에 선을 이리저리 설치할 필요도 없다. 이제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예전에는 꿈도 꿔보지 못한 위성 인터넷의 일상 생활화라니! 내가 처음으로 인터넷을 경험한 것은 방배동역에 있는 구미무역이라는 회사에 들어가 전산실을 맡고 나서다. 그때가 1989년이었다. 한국통신과 데이콤에서 하이텔과 천리안이라는 PC 통신 서비스를 출시할 때였다. 나는 그 통신망을 경유해서 케츠라는 네트워크를 통해서 해외망에 접속을 할 수 있었는데, 그때의 느낌은 마치 내가 우주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가 바로 PC통신의 한계를 넘어 인터넷망에 접속한 첫 경험이었다. PC통신은 같은 통신망에서만 연결 가능한 제한된 텔레커뮤니케이션이었다. 만일에 전화 가입자가 한국통신에 가입한 사람이라면, 하이텔 통신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그곳의 이용자는 모두 한국통신 가입자에 국한되었다. 데이콤 전화가입자라면 천리안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제한적인 PC통신이라도 그곳은 신세계였다. 수많은 이모티콘이 만들어져서 대화의 재미를 한층 더 높였으며 각종 모임이 만들어졌다. 나도 여러 모임에 가입해서 오프라인 모임에도 참가하기도 했다. 시네마천국 같은 모임은 물론 여러 동호회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던 때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에 나우컴이 출발하면서 전화 가입자에 제한없이 통신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만들어졌다. 이 회사는 내가 아는 뱅모라는 사람이 창설한 회사였는데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그 이후에는 다른 곳도 아마 그런 방식으로 전환되지 않았나 싶다. 나는 주로 나우누리에서 활동을 했었다. 21세기프론티어라는 사단법인이 나우누리 내에 온라인 사무국인 CUG (Closed User Group)을 두고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프라인에도 사무국이 있었는데 대기업 수준의 급여를 받는 사무국장과 간사 2명을 순수하게 회원들이 회비로 충당할 정도로 모임이 활발했다. 나는 그곳에서 운영위원도 맡았으며 소모임인 주니어 프론티어를 나우누리에서 운영하기도 했다. 나의 90년대의 대부분은 그곳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PC 통신에 매우 익숙하다. 더구나 매우 치열한 논쟁이 수시로 벌어지던 프론티어에서 생존하기 위해 나 역시 치열하게 참여를 했음으로 나의 온라인 전투력은 그때 생성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던 중 90년대 중반에 한국에도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때 그 붐을 잘 탄 사람들은 지금은 수조원대 거부가 되어 있다. 네이버, 다음 등이 다 그렇다. 나는 그때 돈 버는 것과는 거리가 먼 국제영화제 운영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영상 교육 등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므로 새로운 기술로 돈을 버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비록 나는 1994년에 영화진흥공사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인터넷 교육도 실시하고 최초의 한국 영화 인터넷 포털도 만들고 서울국제만화축제(SICAF)의 첫 인터넷 웹 사이트도 기획하는 등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부터 그 분야에서 큰 경험과 지식을 갖췄으므로 내가 그 분야로 뛰어 들었다면 수조원까지는 몰라도 수천억원의 거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인연은 사소하게 엮이면서 다른 쪽으로 이동하는 것 같다. 그렇게 PC통신이 인터넷에 점차 밀리면서 힘을 잃어간 것은 아마도 1998년 정도가 아닐까 싶다. 1999년과 2000년에는 더 이상 PC통신의 존재는 미미해졌다. 인터넷 시대에 접어 든 것이다.

나 역시 2000년에는 영화산업에서 손을 떼고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다. 디지털굿모닝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지금 생각해도 회사의 이름은 멋지다. 당시에 굿모닝증권이 있어서 비슷한 이름이기는 했지만, 나는 디지털이라는 것이 향후 얼마나 중요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시대를 넘어서 디지털 시대를 향하기 위한 회사였다. 목표는 아마존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아마존은 당시에 책과 CD 등을 판매하던 회사였지만, 적자 투성이었다. 직접 창고를 운영하면서 미국 전역에 책을 집으로 배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2가지 측면에서 다르게 접근했다.

첫째, 나는 창고 대신에 전국에 있는 서점들을 나의 창고 겸 판매처로 사용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래서 나는 디지털 서점 네트워크를 내세웠다. 물류창고 관리나 운영 부담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인터넷 서점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전국 각지의 서점들과 손을 잡겠다는 전략이었다. 각 서점들로서도 인터넷의 영향력이 점점 거세지면서 생존을 위협 받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내가 수호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Foxbook.com을 통해서 그들의 책을 관리해 주고 판매해 주고 온라인 회원을 지역 서점에 몰아 줄 수 있었다. 그들은 온라인에서 주문 온 책을 지역의 회원들에게 배달을 해 줄 수도 있고 회원은 해당 서점을 방문해서 책을 받을 수 있었다. 거기에다 서점들이 각자 인기 있는 책을 사기 위해 현금을 들고 상경해서 밤새도록 출판사 창고에서 줄 서던 방식 대신에 그들의 주문을 폭스북이 대신 처리하면서 더 유리한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현금을 주고 70-80%%에 매입할 수 있었던 책을 65-70%에 매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서점에서 편안하게 받을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내가 800만 명의 유저를 갖고 있는 다모임닷넷과 제휴해서 발행한 폭스북 멤버십 카드를 활용하여 획기적으로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수익 구조였다. 다모임닷넷은 당시에 아이러브스쿨 붐이 있을 때, 초딩에서부터 고딩까지 학생들의 온라인 페이스북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영업을 개시한 후 몇 개월만에 전국의 350개 정도의 서점들이 가맹하였다. 그들은 폭스북 간판을 달고 내부 인테리어도 우리의 세련된 디자인에 따라서 새롭게 단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각 매장의 모든 도서 관리를 우리의 서버로 일원화했다. 회원의 인증에서부터 판매와 재고, 책 주문과 정산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서버에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따라서 나는 당시에 알라딘이나 예스24는 눈에도 차지 않을 정도의 막강한 인프라를 갖출 수 있었다.

두번째 나의 전략은 전 세계의 책을 한국에 수입해서 판매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수입도서 회사에서 일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충분히 승산이 있는 게임이었다. 나는 당시에 세계 최대 도서 데이터베이스를 CD에 담아서 판매하는 원본을 입수해서 해당 자료의 보안을 깨서 자체적으로 전 세계 도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무려 3백 5십만 데이터가 넘는 방대한 데이터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한국의 국사립 연구소와 국사립대학교, 국사립도서관의 도서 수입 입찰에 참가해서 수입 도서 업계를 평정할 계획이었다.

그러는 한편 나는 폭스TV를 운영했다. 영상팀을 운영해서 국내 도서의 주요 뉴스를 매주 방송했다. 그리고 폭스북 도서 지수를 매주 발표했는데 그것은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와 같이 특정 서점을 벗어나 지역과 연령, 직업, 성별 등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책의 판매 동향을 주가처럼 발표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새로운 정책과 방향을 제시하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책 관련 블로그를 운영하던 사이트와 인력을 모두 인수해서 책과 관련한 방대한 비평을 실어 나갔다.

해외의 아동 서적의 수입도 자체적으로 진행했으며, 모든 개발과 디자인은 자체적으로 처리했는데, 개발과 디자인 관련 인력만 열 대여섯명에 달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참고서 분야에 진출했다. 딩북닷컴은 다모임 사이트에 입정해서 참고서만 판매하는 사이트로서 엄청난 가능성을 보였다.

이렇게 1년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회사가 야심차게 진도를 나갔지만, 결정적인 몇 차례의 펀딩에서 실패를 했다. 당시 테헤란로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우리 회사 옆에는 네이버가 있었는데 빌딩의 한 층을 사용할 때였다. 나는 이해진을 만나 펀딩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지만, 그는 나와 같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결합하는 사업 모델에 대해서 시쿤둥했다. 나는 새롬기술과는 400억원 가량의 투자 제안을 받았으며 논의가 막바지에 이를 때 DJ의 벤처기업들의 무분별한 투자에 대해서 경고를 내리면서 투자유치에 실패했다. 그 외에도 몇 개의 가능성들이 있었지만, 그 무렵에 나에게는 운이 더 이상 따르지 않았다. 재기의 발판으로 삼았던 딩북 오픈은 사기꾼과의 계약으로 발목이 잡히면서 나는 폐업을 결정하게 되었다. 사실 인력을 대폭 줄이고 기회를 엿보는 전략을 통해서 생존을 해 나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과감하게 그 사업을 던졌다. 두고두고 아쉬운 상황이었다.

나는 이렇게 인터넷 붐의 한가운데에서 치열하게 생존을 건 투쟁을 한 경험도 있다. 그 이후에 나는 기업인으로서 지금까지 인터넷과 기술,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결합 등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2021년 9월 21일

오후 2시다. 조금 전에 인터넷이 다시 연결되었다. 따지고 보면, 기나긴 시간이었지만, 실수는 아주 간단한 곳에 있었다. 결국은 실수였다. 그래서 자그마치 27시간 동안 인터넷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앞서서 언급했듯이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일부는 모바일이 평소에도 잘 터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실 유선 인터넷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스마트폰으로 충분히 컴퓨터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토록 답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침에 버라이존에 다시 연결을 하기 위해 차를 몰고 근처로 나가서 다시 그 지겨운 채팅을 했다. 내가 연결을 하자마자 다른 말이 나오지 않도록 분명하게 말을 했음에도 최종적으로 약속을 잡기까지 1시간이 넘게 소요되었다. 그나마 오늘은 불가능하고 내일 아침에나 가능한 상황이었다. 잘못은 내게 있으므로 $99의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나는 그나마 감지덕지라고 생각하고 집에 돌아왔다.

잠시 후에 전기 기사가 도착했다. 몇 주 전부터 이 사람을 불렀는데 휴가 등의 사유로 오늘에서야 도착했다. 오전에 오기로 했지만, 맨해튼에서 작업을 나갔다가 거의 오후 1시 쯤에 우리 집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그로부터 240볼트의 전기를 테슬라 전기 충전을 위해서 봄에 설치했었다. 이번에는 세탁 드라이어를 가스용에서 전기용으로 바꾸기 위해 그로부터 의견을 듣고자 한 것이다. 집의 구조 등을 확인한 후 작업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그로부터 받았다. 나는 그에게 내가 인터넷 선을 자른 후 다시 연결을 했으나 이상하게 안된다며 그의 의견을 들었다. 전기기사이므로 당연히 그런 것은 쉽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광케이블이라면 모르지만, 구리선인데 왜 안되는지 모르겠다고 그에게 물어보니, 분명히 구리선이므로 당연히 연결되는 게 맞다고 그는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 집에 라우터는 집 외벽에 설치되어 있다. 거기까지 광케이블이 들어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 라우터에서부터 집에는 일반 인터넷 선이었다. 따라서 나는 제대로 작업을 한 것이다. 그가 돌아간 후, 나는 라우터의 전원을 다시 작동시켜서 확인을 해 봤는데, 결국 나의 사소한 실수는 인터넷 선을 인입선에 꼽지 않고 일반 방출선에 꼽았던 것이다. 아주 사소한 실수로 인하여 27시간 동안 외부와 단절된 경험을 했다. 나는 버라이존에 연락해서 약속을 취소한 것은 물론이다.

조금 전에 은행을 다녀온 뒤, 샤워를 하고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하루 이틀 정도의 사이버 불통이라면 큰 불편은 없겠지만, 요즘은 확실히 다르다. 그야말로 부자연스러운 느낌의 연속이었다. 어제는 오랜만에 책을 집어 들어 읽었다. 차라리 단념을 하고 오랜만에 주어진 오프라인 삶을 즐겨 보자고 생각했지만, 아침에 일어나 식사 준비를 하면서 마음이 바빠졌다. 무려 33년간의 사이버 생활에 익숙한 나로서는 어색한 시간들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위성 인터넷인 스타링크를 신청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막상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마음이 바뀌었다. 일단 매월 지출되는 가격 차이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타링크는 아직 서비스 초기라서 몇달에 한번씩은 끊기는 문제도 있으니 안전한 유선 인터넷으로 물러나는 내 마음을 어쩔 수가 없다. 하룻만에 마음을 바꾼 나는 졸지에 스스로 줏대가 없는 사내가 되었다.

인터넷이 안되니 테슬라 게임을 몇 시간할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 1등을 하고 있었지만, 덕분에 멀찌감치 앞서갈 수 있었다. 오늘 저녁 시간에 딸 아이가 집으로 가면서 나에게 안부 메시지를 보내 왔다.

딸 아이는 작년부터 스튜디오 클래스에서 제일 빛나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전에는 그 과목 때문에 졸업만 하고 건축가 생활은 하지 않을 것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건축학과의 핵심은 스튜디오 과목인데 만나는 교수마다 거의 80 노인에 백인 남자로 아무런 목표도 없는, 그야말로 틀에 박힌 죽은 강의를 하는 까닭에 아이가 아주 힘들어 했었다. 매학기마다 6-7개 정도의 스튜디오 클래스가 열리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최우선 순위로 지망한 교수들 강의는 되지 않고 인종차별주의가 뼈에 박힌 인간들의 강의만 들으면서 심적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작년부터는 젊고 에너지가 넘치는, 창의적인 교수들 강의를 듣게 되면서 인생이 폈다. 우리 부부는 작년부터 겨우 쪼그라든 심장을 펼 수 있게 되었다.

딸 아이가 매주 일요일에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학교 근처의 한 식당으로 서빙을 하고 있다. 출근을 하는 길이라며 딸이 나에게 전화를 해 왔다. 교수가 보자고 해서 3시간 미팅을 하고 지금 식당으로 일하러 가는 중이라면서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서 교수와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교수는 아이의 것을 학생들에게 공유하면 좋겠다고 딸 아이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동기를 갖고 프로젝트 진행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내 딸은 내심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다른 학생들에게 공유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이 화요일에 학생들에게 공유하면서 설명하겠다고 했단다. 다른 학생들은 내 딸의 1/3도 진도를 못 나가고 품질도 많이 떨어진다면서 딸에게 칭찬을 했다고 한다. 이번의 교수는 매우 크리에티브한 프로젝트 진행으로 전통적인 학습과는 달라서 많은 학생들이 기피하는 과목이라고 한다. 반면에 내 딸에게는 그런 것에 궁합이 잘 맞으니 물만난 제비가 아닌가 싶다. 내가 어쩌다 가는 사주팔자 보는 사람이 하는 왈, 루비는 작년 가을전까지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거치는 팔자라고 했다. 내년부터는 거칠게 없는 팔자라고 하니, 그게 맞든 틀리든 아비된 입장에서 마음이 놓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이번주 금요일에는 워싱턴 DC를 간다. 아들 녀석을 보기 위해서다. 그날 오전 수업 밖에 없다고 하니 그래도 가서 얼굴이라도 보면서 어루만져 주고 와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다 커서 세상에 나가 이제는 홀가분해진 줄 알았는데, 정도가 다를 뿐 마음과 손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나의 선친과 자친께서도 우리 일곱 자식들에게 똑 같은 마음이셨겠지. 추석이라고는 하지만, 제사도 지낼 위치가 아니어서, 그냥 사진과 유품을 쳐다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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