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하 from the Queen

불려지고 싶은 것들

우리가 살면서 부르고 싶은 것들, 불려지고 싶은 것들 몇 개 쯤은 다들 갖고 있지 않을까?

어제 (2017년 6월 17일) 저녁에 나는 나의 딸과 함께 근처에서 장을 보고 와서 이곳으로 이사 온 후 처음으로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식사를 하면서 나의 딸하고 이름에 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아빠는 자신이 세운 마을이나 나라에 이름을 짓는다면 뭐라고 하고 싶어?”

“그레이트 썸머. 위대한 여름.”

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보통 어떤 대답을 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는 신중파인데 이 대답은 쉽게 나의 입에서 나왔다.

나의 딸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기에 가만히 웃었다. 그녀는 내가 써 온 이름들과 그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할아버지는 봄에 태어난 아빠 이름에 여름을 의미하는 ‘하’를 붙이셨나?”

그렇다. 나는 봄에 태어났다. 음력으로 2월 25일이고 양력으로 3월 20일이다. 그러므로 진짜 봄이 막 시작할 때에 태어났다. 그래서 대춘이라고 이름을 지으셨어야 맞다. 강대춘. 좀 어색하지만, 내가 이 이름을 갖고 세상을 살았다면 완전히 달라진 인생 항로를 걸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우리 형제들의 이름을 지으신 이유에 대해 설명하시는 것을 한 두번 들은 것 같다. 나는 진주 강씨로서 큰대자를 돌림으로 하는 23대손이다. 나의 큰 형은 법헌자를 써서 이 다음에 법관이 되라는 의미로 붙이셨단다. 둘째는 이룰성으로 크게 이루라고, 셋째는 심을식자로 크게 무엇가를 남겼으면 하는 염원을 담으셨다고 하셨다. 막내는 범호자로 세상 무서워하지 말고 대범하게 살라는 뜻이셨을텐데, 내가 어렸을 때였으므로 어쩌면 막내가 태어나기전에 나의 아버지로부터 그런 설명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나의 이름에 대해서 뭐라고 나의 아버지께서 하셨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성하의 계절을 언급하시지 않으셨을까? 여름하자를 지어 주셨으니까. 농사꾼이셨던 아버지는 그래도 여름이라는 계절이 만물의 생명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계절이므로 나의 이름에 그런 바램을 담으셨을 것 같다.

“위대한 여름. 좋은 이름이지. 성하의 계절이니까.”

나는 내 딸에게 말했다.

딸은 여전히 내 답변에 믿음을 보내지 않는다. 내가 이름에 조금 집착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도 없는 사람이 왜 이름에 대해서는 유독 이상하리만큼 이성적이지 못할까 하는 의심 말이다. 그녀도 이제 곧 미국 이름으로 바꿔야 하니까 고민스러울 것이다. 나는 내 경험 때문이라고 얘기를 해 줬다. 내가 십대 후반에 서울 종로2가역에서 교보문고 방향의 골목에 있었던 금자탑학원(김두한이 깡패두목을 할 때 그의 주무대였던 종로회관 자리거나 근처였을 것이다)에서 검정고시를 공부할 때였다. 이곳에서 지금까지도 나의 베스트 프랜드인 KSU도 만났다. 그 학원에는 이십대 말에서 삽십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국어 선생이 있었는데, 아주 실력이 있었다. 하루는 몇몇 학생들의 이름을 물어보면서 그가 한마디씩 촌평을 했다. 그때마다 그로부터 평을 들은 학생들의 대부분은 외마디를 했다. 그가 한 여학생의 이름을 묻더니 평소에 어디가 아프지 않냐고 물었다. 그 여학생의 입에서 ‘헉!’하는 소리가 났다. 그 사람은 한문의 뜻이나 사주팔자 등에는 의미를 두지 않고 오로지 성가, 즉 소리에만 의미를 두고 분석했다. 한글의 획순도 참고한 것 같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즉 태어나기 전부터 갖고 있던 점 말고 중간에 자신의 몸에 주먹만한 점이 생긴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우주의 영혼이 깃든 것이라고 뜬금 없이 얘기했다. 그러므로 큰 일을 해야 할 운명이라고 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되던 해 여름에 어머니가 마당의 수돗가에서 나의 등을 씻어 주시다가(등먹)을 해 주시다가 깜짝 놀라셨다.

“오마야! 여기 옆구리에 이게 왠 큰 점이냐? 이게 언제 생겼지?”

그래서 그때 나도 처음 알았다, 내 오른쪽 옆구리에 큰 점이 갑자기 생겼다는 것을. 나의 어머니도 모르고 계셨으므로 그 무렵에 생겼거나 적어도 1년 안에 생긴 것이 분명하다. 그곳은 내 스스로도 볼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산골에서 사내 아이들은 더우면 웃통을 훌러덩 벗고 다니곤 했으므로 평소에 어머니께서 그것을 모르셨리가 없다. 그 금자탑학원의 국어 선생이 그런 얘기를 한 이후부터 나에게 헛바람이 들었다. 나는 강위대한이라고. 그 경위는 이렇다.

하루는 그 선생이 수업 중에 자기 경험을 우리들에게 말했다:
“하루는 내가 강의를 하다가 이상한 예감이 들어 수업을 중간에 그만두고 부리나케 차를 몰고 나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로의 모든 신호등이 모두 녹색으로 켜져서 한순간에 나는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집에 막 도착했는데 나의 집 근처에 있는 제법 깊은 도랑에서 나의 어린 아들이 도랑에 빠진 신발 하나를 주으려고 몸을 막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목숨을 내가 간신히 건질 수 있었다.”

그 아슬아슬하고 놀라운 그 사람의 에피소드는 이후 그 사람이 우리들에게 하는 말에 한층 높은 신뢰를 실어 준 것은 말한 것도 없었다. 그때 이후로 두텁고 검은테의 안경을 쓴 그 사람이 우리에게는 선생이 아니라 거리에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야 할 도사처럼 보였다. 그 사람의 설명에 의하면 이름 끝 자리의 받침이 이응 ‘ㅇ’으로 끝나면 고생하는 인생이 많다고 했다. 끝이 닫히지 않고 열려 있어서 하는 일마다 매듭이 잘 지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거기에다 이름자의 획순의 숫자도 참고해서 이름 풀이를 했다. 보통 한국에서 성명학을 하는 사람들은 한글 대신에 한자를 써 놓고 뭐라고뭐라고 풀이를 하는 게 일반적인데 그 사람은 한글 순수주의자였는지 한글로만 풀이를 했다. 그래서 한자를 싫어하는 나에게 더 믿음이 갔다. “보통 사람들의 이름이 불려지는 것은 통상 누군가가 불러주기 때문이며 그때는 글자가 아니라 소리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라면서 그가 설명했다. 그 이후부터 나는 이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나의 딸에게 설명했다. 나는 그 당시에 그 국어 선생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 지론에 따르면 나의 이름도 끝이 ‘하-아’로 끝나기 때문에 힘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하” 대신에 “대한”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강대한”, “광대한……”하고 마음 속으로만.

위대한

나는 군대에 입대하기 직전에 서울 제기동의 경동시장 사거리에 있던 양식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을 할 때, 나를 스스로 “위대한”으로 소개했다.

“자네 이름이 뭔가?”

허인하라는 이름답게 낭만적이고 고독하게 생긴 이십대 후반의 레스토랑의 선임 웨이터 겸 매니저가 나에게 물었다.

“위대한입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서 위대한 느낌을 발견했는지 그는 어린 나를 진심으로 존중해줬다. 내가 일하는 도중에 깊은 사색에 빠져 있으면 그는 나를 방해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행여 다른 웨이터들이 나를 귀찮게 하는 것도 미리 막아 줬다.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아가씨를 내가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며칠 동안 정신차리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내가 짝사랑했던 아가씨였는데 갑자기 몇 년 후에 홀연히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도 바텐더로 말이다. 그 레스토랑은 바가 있어서 칵테일이나 양주 등을 팔았다. 지금 생각해 봐도 고급 레스토랑이었는데 식당의 이름은 “여왕”이었다. 그 이름처럼 예상 밖으로 나의 “여왕”이 스스로 나를 찾아 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오직 나 혼자 그녀를 알아 봤을 뿐이었다. 그것은 몇 년전에 내가 그녀를 짝사랑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내가 고향의 내 친구와 서울의 사당동 3동 어디메쯤에 있는 어느 지하실에 있는 한 소규모 개인 전자업체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그 회사는 FM 라디오와 전축을 만들어서 청계천이나 전차 회사에 납품하고 있었다. 삼십대 중반의 그 회사 사장이 직접 PCB(Printed circuit board)를 설계했는데 아주 스마트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자부심이 강했다. 그 사람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는 우리 둘을 포함해서 총 4명이었다. 종업원 중 제일 경험이 많은 사람은 사장처럼 어렸을 때에 소아마비를 앓아 몸이 불편한 이십대 후반의 사내였다. 그리고 그 밑에 늘 웃음이 많은 이십대 중반의 사내가 있었고 우리는 십대 후반의 헷병아리들이었다. 그후 내 친구는 그곳에서 몇 년을 더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워 평생 그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되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2~3달만 일하고 그만뒀다.

어느 날 그 회사에 한 소녀가 들어왔다. 그때까지 내 인생에서 만나본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우리처럼 전자부품들을 인쇄회로기판에 꼽는 작업을 했지만 서툴렀다. 나는 매순간 호흡이 멎을 것 같은 가슴앓이를 했다. 언제쯤 고백을 해야 하나 생각을 하고 있는데 출근을 한지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그 소녀가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이미 그녀를 깊이 짝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밤마다 한마디도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 잃어버린 사랑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괴로웠다. 나는 결국 그곳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잊었다. 어차피 만날 수도 없는 사람이라면 잊는 게 나을테니까.

그러다가 몇 년 후에 기적처럼, 거짓말처럼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녀가 내가 알던 그녀인지는 확신이 없다. 그러기에는 새로 나타난 그녀가 너무 성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공장에서 그녀와 같이 일한 시간이 너무나 짧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소녀가 몇 년이 흐른 뒤에 완전히 성숙해진 아가씨로 나타났으므로 동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처음 식당 문을 열고 들어 올 때, 나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그녀가 그녀라고 확신했다. 아마도 내 생각이 맞을 것이다.

나는, 위대한 나는, 근무 중에 기둥에 몸을 기댄 채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그것은 더 이상 흠모가 아니라 일종의 연민이었다. 어쩌다가 남들처럼 공부할 나이에 그녀는 공장에 다니다가 이제는 바텐터가 되어 밤 늦도록 사내들의 눈요기가 되어야 하는지 그게 안타까워서 보내는 나의 슬픈 시선이었다. 나는 퇴근할 때에 기회를 봐서 “내가 너를 만난 적이 있다, 그렇게 훌쩍 떠나서 내가 얼마나 아파했는지 모른다”고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퇴근 후에 문을 열고 떠나는 그녀를 나는 한 번도 잡지 못했다. 당시에 나는 그 식당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손님들이 쉬거나 대기하는 긴 소파에서 잠을 잤다. 그러다 어쩌면 그때와 같이 1주일 만에 그녀는 떠난다는 말도 없이 더 이상 출하지 않았다. 나도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와 군입대를 준비했다.

그러던 하루는 허인하라는 발신인의 편지가 고향집에 도착해 있었다.

‘생각이 위대했던 녀석 위대한에게……’라고 편지 내용은 시작하고 있었다. 그 형은 내가 있는 짧은 기간 동안 나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노라고 쓰고 있었다. 정말 이름처럼 위대한 녀석인 것 같다고. 그것은 내가 짝사랑하고 잊어 버렸던 여인이 홀연히 나타나서 나를 사색하는 사람처럼 만들어 놨기 때문에 착각을 한 것일 게다. 그 형이 볼 때에 다른 웨이터들이 보이고 있는 가벼움에 비해 내가 얼마나 고상하게 보였을지 짐작이 간다. 군대에 끌려가야 하는 나의 팔자에다가 짝사랑했던 여인을 칵테일 바텐더로 다시 만난 기구한 인생에 대해서 내가 느낀 자괴감을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내가 전자업체에서 일을 할 때에 웃음 많던 이십대 중반의 사내는 내 이름을 갖고 그랬다.

“대하? 새우? 큰 새우?”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 그에게 내가 그랬다.

“위대한 여름이거든요. 큰 새우가 아니라. 큰 대자에 여름 하입니다. 새우 하가 아니구요.”

내 이름에서 ‘하’라는 한자에 새우라는 의미도 있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그는 내가 나중에 위대하게 되어 있을 거라고 얘기해 줬다. 그는 나의 이름을 기억해 둬야할 것 같다면서 내 이름을 몇 번이나 혼자 중얼 거렸다. 그러면서 “강대하, 이름이 아주 멋져.” 하고 치켜 세웠다. 나도 그 금자탑학원에서 주술사와 같은 그 이상한 국어 선생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이름에 대해서 전혀 고민하지 않고 살았을지 모른다. “아는 것이 독이다”라는 속담도 있다.

내가 군에 복무하는 동안, 물론 나의 고향 마을에 있는 22사단의 공병대대에 출퇴근하는 방위였지만, 나는 서울에 있는 몇몇 친구들과 편지에서 ‘위대한으로부터’라고 마무리를 짓곤했다. 정말, 나는 위대해 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정작, 무엇을 통해 위대해 지고 싶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막연하게 가슴이 늘 뜨거웠다. 그러나 현실은 나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니 나의 가슴은 늘 답답하고 아팠다.

허인하 from the Queen

“허인하”라는 이름 석자를 3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핸섬한 그의 얼굴, 긴 머리에 긴 손가락을 한 그는 마치 일본 만화의 주인공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위에서 설명을 했듯이 그는 내가 군 입대전에 서울의 한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을 할 때 그곳의 메니저셨다. 내가 지금까지도 가끔 이분이 어떻게 지내실까 궁금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오늘 아주 우연한 일 때문이다.

조금 전에 나는 “아버지”라는 제목의 글을 쓰면서 그 글 속에 넣을 이미지를 찾던 중에 아주 뜻 밖의 이미지를 하나 발견해서 놀랐다. 나의 컴퓨터 폴더에 내가 발견했는데 내가 아주 오래전에 스캔한 한 이미지였다. 그 이미지는 내가 얼마 전에 페이스북의 친구 추천 리스트를 통해 낯익은 이름을 발견해서 25년 만에 서로의 안부를 메신저로 주고 받았던 CKR와 관련이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보냈던 국제우편 봉투를 스캔한 이미지였다. 그리고 그 속에 있었을 편지 내용도 스캔되어 있었지만 이미지가 너무 흐려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런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편 소인이 1994년 9월 14일로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서 CKR이 서울에서 파리로 간 후에 내게 보낸 것 같다. 그녀는 연세대학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였는데 나는 그 무렵에 그녀와 그녀 친구와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우편물에는 내가 당시에 제작 기획을 맡았던 백자원씨에 관한 다큐멘터리 관련 자료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제주도에서 “탐라목석원”을 운영하던 백자원 씨를 중심 인물로 다큐멘터리를 촬영중이던 프랑스의 한 여성 감독을 도와서 한국에서의 제작을 기획하고 있었을 때였다. 아무튼 나는 갑자기 뜻하지 않게 우연하게 발견한 내용이라서 매우 신기하고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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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지하실에 내려 갔다. 이 집으로 이사를 온 후에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한 구석에 놓여 있던 캐비넷을 열어 낡은 비닐 봉투에 쌓여 있는 뭉치를 꺼냈다. 내가 나의 아내와 결혼하지 전의 나의 사적인 편지들과 사진들을 비닐 봉지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봉지 안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동안 한 두 번은 확인했겠지만 각 내용물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내가 나의 고향에서 군생활을 할 때에 주고 받은 편지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두 번에 걸쳐서 나의 사적인 귀중한 소지품을 잃어 버린 적이 있다. 일찍이 객지 생활을 한 나는 이사를 자주 다녔으며 어떤 경우에는 잠을 잘 곳이 없을 때도 있었다. 한 번은 내가 이십대일 때 나의 한 친척 집에 나의 사적인 짐을 맡겨 놓았다가 모두 분실했다. 또 한 번은 위의 CKR이 나에게 보낸 건물의 7층에 내가 운영하던 사무실에 나의 소지품을 두었는데, 그때 모두 분실했다.

나는 그 비닐 봉지를 열어 하나씩 살펴 봤다. 나의 친구들과 주고 받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전혀 뜻 밖에도 나는 허인하씨로부터 온 편지를 발견했다. 나는 그분으로부터 온 편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편지 봉투와 함께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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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그 분을 집시 같은 영혼을 지녔다고 생각했는데 편지를 읽어보니 그는 그 스스로를 집시라고 묘사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QUEEN에서 한달 가량 있었것 같다. 아니면 그 보다 더 짧게 있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는 그곳에서 급여를 받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시에 나는 그곳을 떠나면서 그 매니저에게 별다른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그렇게 갑자기 그곳을 떠난 것은 그 바텐더 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 의사와 무관한 일이었다.

어느 날 밤, 내 인생에 언제나 도움이 되지 않았던 정순일이라는 내 친구가 내가 일하는 식당으로 찾아 왔다. 그는 나보다 두 살이 많은 사람이었으므로 우리는 친구 관계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 밤 그는 나와 나이가 같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심지어 나보다도 생일이 열흘이나 늦었다. 몇 년 동안 나는 그에게 “형”이라는 호칭을 쓰면서 대우를 해 줬기 때문에 그때 나는 큰 배신감과 함께 당황했다. 그래서 그날부터 어색하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나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정순일은 믿을 수 없어하는 나에게 그의 이름을 불러 보라고 보챘다. 나는 몇 년 동안이나 그를 “형”이라고 불렀는데 갑자기 “순일아!”하고 불러야 했던 그 순간이 기억난다. 나는 기분이 언짢았다. 다음 날 아침에 나는 그와 함께 그곳을 떠나 나의 고향으로 함께 왔다. 순일이가 갑자기 나를 찾아와서 혼란스럽게 한 까닭에 나는 식당의 매니저인 허인하씨에게 떠난다는 인사나 메모조차 하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그후에 나는 허인하라는 분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 같다.

나는 그가 보고 싶다. 내가 나를 “위대한”이라고 그에게 소개했을 때 그는 스스럼 없이 나를 “위대한”이라고 불러줬다. 지금 쯤은 거의 육십대 중반이 되었을 그 분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계신지 궁금하다. 혹시 그의 말대로 집시가 되어 세상 어디메쯤을 자유롭게 여행 중은 아닐까? 우리가 재회할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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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머리를 깍고 군대에 입대할 무렵에는 내 인생에 대해 매우 심각했던 것 같다. 이 사진은 내가 방위로 군복무를 하던 기간에 찍은 것인데, 늘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허인하씨가 그의 편지에서 나를 “생각 덩어리”라고 묘사했나보다.


From QUEEN

생각이 위대했던 녀석 위대한에게….!

위대한 녀석처럼 (늘 네가 했던 말 그대로) 인연과 바램을 위대하게 매정히 차 버리고 빈 곳에 나 혼자 있게 했던 녀석… 녀석을 생각할 때면 때 묻지 않은 사고력으로서 매매일을 고민하고 사색하면서 정립되지 않은 믿음의 울분으로 항상 눈망울에 불꽃을 튀기던 겨우 20살 갓 넘어간 대한의 모습이 아직도 인하에게는 선하다.

QUEEN은 여전히 성업 중이다.

귀한 대한의 땀과 울분이 잠시 머물고 갔던 그 자리에는 오늘도 인하는 부르는 소리에 달려가야 하는 그런 일상을 보내고 있다. 늘 비워져 있으나 아무도 같이 하지 않는 내 마음의 방 한 구석에 의지는 여전히 쭈구린 채 졸음을 쫓지 못하구 있구나.

대한아!

인간이란 다 그렇구 그런 것 같다.

별 볼 일 없는 주제에 제법 그럴싸한 입놀림으로 상대를 포용하는 그런 삶에 질질 이끌려 가는 그런 것 말이다. 내가 늘 그런 것처럼 주제를 모르는 채 별 것도 아닌 주제에 너의 귀한 글을 받는다. 그런 식으로 떠났을 때는 그렇고 그런 녀석이었구나 했으며 뒤로는 한 번도 네 생각을 않던 놈에게 선물치고는 굉장히 값진 선물이었다.

대한 건강하다니 반갑다.

노가다 전선에서 질통을 짊어지고 공사판을 오고 갈 분노에 찬 네 모습이 갑자기 떠 오른다.

” 난 야망과 믿음에 살아간다. 서정어린 순수한 문학에 도전하며 난 비리와 투기에 젖은 세상을 비웃고 있다. 그래서 울분에 찬 스무살 정열이 먼지와 짐통과 힘겨운 노동 속에서 불타고 있다. 오라 세상이여. 위대한 위대한의 위대한 내일의 발상을 위해서—” 라고 외쳐대며 땀 흐르는 얼굴… 이글 거리는 탐구의 눈, 그런 모습이 말이다.

인간은 같이 해 줄 인생의 기틀이 없기에 쉽게 세상을 살지 못하는 거란다. 네 녀석이 그같이 울분 속에 사는 것도 마찬가지인거지. 그런 중에 인하라는 무능력 투성이의 벌레도 있다. 그렇지만 인하나 대한은 젊었으며 투지와 인내에 있어 끈질길 수가 있는 힘이 있다. 좌초해도 어느새 정비하여 항로에 들어설 수 있는 힘…. 그것으로 우린 생명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너도 마찬가지이지만 인하 역시도 마찬가지여야 하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육체는 피로와 고뇌에 절어 있어도 발생 즉 해골 바가지는 썩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가뭄과 바람에 쓰러지지 않으며 항상 싱싱히 가지를 뻣는 법처럼 처해 있는 상황, 환경, 여건 같은 것은 추호도 인생을 변화시킬 수가 없는 것이야. 즉, 견고한 자기적 정립이 되어 있는 자는 정신이 썩지 않을 것이며 정신이 썩지 않은 자는 좌절에서도 미소를 띄울 줄 알고 버림을 받고서도 웃을 줄 알며 넘어지고서도 벌떡 일어널 수 있는 것이다.

대한아! 젊었다 우린. 아직도 비전을 위해 우리 앞에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도 충분하다.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거야 (눈에는 초지일관 변함없는 전진의 빛을 띄운 채) 우린 될 수 있다 (승과 패의 승산은 오십보 백보니까).

곧 군에 입대할 즈음이라 마음이 무척 뒤숭숭하겠지. 그럴수록 더더욱 너는 숨겨진 심층 내부의 위대한을 발견하는 것에 전념해야 돼 (항상 깊이 있는 사고와 평범한 생활, 충분한 휴식을 하며). 네 놈이 글을 정성 들여 안써서 나도 개같이 썻다. 비겨야 하니까 (난 이기는 것에 대해서는 별 흥미가 없으나 믿지기는 싫다). 그리고 만년필은 웬만하면 돌려 주도록 해라. 죽어간 친구 녀석이 운명하기 이틀 전에 내게 사준 것이니까. 2000원짜리이나 난 그것을 쉽게 버려서는 안될 것 같이다. 만년필 이야기는 해주어서 알지도 모를텐데 말이야. 돌려 보내기 싫으면 인하에게 있어서는 그 정도로 중요한 것이니까 대신 네가 눈을 감을 때까지 인하라는 이름을 기억하겠다고 하는 그런 정심으로 간직해 주길 바란다. 항상 나의 쪼끼 주머니에 꽂혀져서 생명의 호흡을 내 심장에 전해주며 시한부 인생을 살다간 스무일곱살 짜리 형석이의 문신이었으니 말이다.

대한…..!

서울, 아니 QUEEN에서의 불과 얼마간 울분 속에서 네가 있었을 때 짙은 고뇌에 절었으면서도 늘 표현하지 않았으며 늘 미소 속에 살아가던 인하라는 정적 집시에게 넌 친구가 되어 주었었다. 집시의 일생은 방황 중에서 자기도 어디인지를 모르는 어느 도시의 외곽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센티멘탈한 드라마인지도 모른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치고 세상 온 곳을 떠돌다가 어디에선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런 것을 집시 세계에서는 먼 곳에서의 그리움이라 한다) 짙은 애수에 젖다가 일생을 마친다 한다. 점치는 일과 구슬 픈 노래 그리고 괴상한 모양의 애잔한 음율의 현악기, 수 많은 이들과 수 많은 대화를, 그리고 머나 먼 방랑의 길….

그래, 인하는 집시의 피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집시일지도 모른다. 메마르고 구획적으로 온통 조직적인 체계에선 도시의 건조한, 오염된 대기를 마시며 얼키고 설킨 이해관계 속에 야비한 700만의 각기 다른 성격들을 가진 사람들이 뒤엉켜 살아가는 이 서울 땅에서 난 이미 버려진 집시가 되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진실과 믿음과 무언가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을 찾아 오늘을 배회하는 그런 집시 말이다.

그러나 나는 가난을 사랑해. 그래서 울분과 우수에 젖어서 하루 속에서 깊이 생각하던 너를 갑자기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한 – 편지 고마워 – 언제건 편지하고 시도 보내 주고 군입대 하기 전 집시와 알코올의 힘에 짓눌려 보자꾸나. Adois.

네가 요만큼 썼으니 나도 요만큼 썼고 너도 노트를 찍어 편지를 썼으니 나 역시 노트를 찢어 편지를 한다.

난 비기기를 좋아해.

꿈 속에 살아가는 생각 덩어리

위대한을 사랑하는 집시 형이.

From QUEEN

wusukkang
  • wusuk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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