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y Essay Thinking and Sharing

그해의 인연들에 감사하며

촌지

어느 한 기업과 관련하여 내가 쓴 기사가 인쇄되던 날, 나는 신문 몇 부를 그 회사에 전달해 주러 간 적이 있다. 자세하게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갓 나온 신문을 건넨 후 접견실로 안내받아 잠시 기다렸다. 그 회사는 취재를 위해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는 달리 조금 정중한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위 중앙 메이저 신문사 기자가 아니면 어디를 가나 제대로 된 대접을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더구나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삼류의 허접한 신문사 기자 아닌가? 그런데도 자신이 일류 신문사 소속인양 거들먹거리는 사이비 기자들이 당시에는 많았다. 사실 일류든 삼류든 거들먹거린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유리한 위치를 이용해서 상대에게 위압을 행사해 자신에게 이로운 뭔가를 얻어 내려는 수작에 불과하므로 메이저든 아니든 그런 자들은 모두 사이비 언론인이다. 몇십 분이 흘렀을까, 그곳의 고위 임원인듯한 사람이 나에게 흰 봉투를 건넸다. 내가 그 회사를 취재할 때 사진을 담당했던, 나와 입사 시기가 몇 주 빨라서 동기 의식이 생긴 한 남자(M이라고 부르겠다)도 동행했는데 물론 그에게도 봉투가 건네졌다. ‘촌지’를 건네면서 그 기업의 임원은 나에게 기사를 잘 써줘서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아마도 사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내 기사를 읽어보고 다들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돈 봉투를 열어 보고 무척 놀랐다. 무려 50만 원이 들어 있었다. 1986년의 한국돈 50만원이면 현재 가치로는 1,658,082.56원 ($1,430)에 해당한다. 내가 기자질을 하면서 처음 받은 촌지였다. 짜릿하게 촌지의 맛이 느껴졌다. 당시에는 그런 촌지가 일상이라는 것도 모르던 햇병아리 시절 이야기이다.

그 전에 월간지 같은 잡지사에서 일할 때에는 그런 촌지는 감히 꿈조차 꿔 보지 못했다. 취재원이 왜 촌지를 주는가? 오히려 인터뷰 좀 해 달라고 사정하고 사정해야 겨우 허락을 받을 판에 돈까지 찔러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같은 월간지라도 메이저 언론사에 소속된 월간지 기자들은 자기들이 마치 일간지 기자인 양 목덜미에 힘을 주고 촌지를 받았을지는 모른다. 그런 삼류 세계에도 또다시 일류와 삼류가 늘 존재하게 마련이었다. 반면에 비록 전문지일지라도 일간지 바닥으로 넘어오니까 생태계가 완전히 달랐다. 그 바닥에서 한두 해 경험이 있다는 M은 촌지를 받는 동작이 내 눈에는 꽤나 익숙하다고 느껴졌다. 어쩌면 접견실에서 기다리면서 나와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는 마음속으로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회사에 돌아오니 나의 사수인 ‘차장’은 내가 받은 촌지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 왔다. 의레 촌지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그는 나의 대답을 듣더니 환한 미소와 함께 꽤 잘 받았다며 내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려 줬다. 사수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 바닥에서 기사의 질은 봉투의 두께로 평가를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나는 하마터면 그런 촌지의 짜릿함에 길들어서 평생 그런 사이비 기자질을 할 뻔했다. 인생의 길은 한 두 끗발의 차이로 갈라지곤 한다.

내가 썼던 기사의 내용은 당시에 서울시 1호선 지하철에 설치된 CCTV를 생산하고 공급하던 (주)오리엔탈전자공업에 관한 것이었다. 결국은 일종의 상품 홍보성 기사였는데 나는 단순히 상품 홍보를 넘어서 그 기업의 간략한 역사와 미래의 발전 가능성에도 큰 비중을 두고 기사를 썼었다. 나는 실제로 CCTV라는 첨단 장비에 흥미를 느꼈기에 마무리도 아주 감동적이면서 힘이 있게 썼던 것 같다. 예를 들면, 그 회사의 이름에 힌트를 얻어서, 향후 CCTV 산업의 발전 가능성과 그 기업이 동양을 넘어 전 세계 글로벌 시장을 이끌 전도가 유망한 중견기업이라고 마무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 기사는 당시에 내가 갓 들어간 그 신문사에서 작성한 첫 번째 기사였으며 신문의 한 면을 꽉 채운, 비중 있는 기사였다. 내가 처음에 그 기사를 작성해서 데스크에 넘겼을 때, 원고를 읽어 본 그 회사의 사장이 편집국장에게, “저 친구, 잘 쓰는군. 잘 키워 봐.”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나는 첫눈에 사이비 언론사 사주의 눈에 들었다. 신문에 기사가 잘 나가면 해당 기업으로서는 여기저기에 기업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수단으로 삼기에 가장 유효적절하던 시절이었다. 콧대 높은 중앙일간지에서 그런 기업을 취재할 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으로서는 부담이 없는 비용으로 기업 홍보를 할 만한 수단이 마땅하게 없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런 기사를 낸 신문사의 광고팀에서는 잽싸게 그 기사를 이용해서 해당 기업을 방문해 후속 광고를 내자고 목을 조일 것이 뻔했다. 그런 것은 중앙 일간지에서도 써먹는 전통적인 오래된 수법이었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사실 촌지를 받을 때, 내 가슴은 방망이질을 쳤다. ‘어, 이거 뭐야?’ 하며 잠시 놀랐지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도 드디어 촌지를 받는 위치가 되었구나.’ 그것도 50만 원이라니! 당시의 월급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가 1986년으로 내 나이가 만으로 겨우 스물셋일 때였다. 아마도 그 세계에서 남자 중 가장 나이 어린 축에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회사에서 제대로 실력 발휘도 해 보지 못하고 곧바로 잘렸는데 남을 위해 괜히 나섰다가 그렇게 되었다. 들어간 지 2주가 되어 그 회사의 급여 날이 되었다. 남들은 다들 급여 봉투를 받아 들고 가방을 챙겨 퇴근하는데 말끔하게 양복을 입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그 M과 나의 급여 봉투만 끝내 나오지 않았다. 원래는 급여 날이면, 1주일을 일해도 그만큼은 계산해서 처리해 주는 게 정상이었다. M은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했다는데 당시에는 일류대학이 아니면 취직할 곳이 마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멀대 같이 키가 컸던 M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서 스물여덟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남자가 재수하고 대학 다니다가 휴학해서 군대 갔다 와 대학을 마저 졸업하면 대충 스물 일곱이나 여덟, 혹은 아홉은 되기에 십상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친구의 얼굴은 이상하게 기억이 난다. 그가 다른 곳에서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봐서 나이는 제법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서로 존대를 하고 지냈지만, 동기처럼 점심 식사도 같이하면서 보냈다. 그러나 그 사내는 내 타입은 아니어서 사적인 얘기는 별로 하고 지내지 않아 서로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사적인 대화를 하기에는 우리에게는 너무 짧은 기간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둘이서 급여를 받지 못하게 되자 그것 때문에 한 팀이 되었다. 다음 날인가 내가 그 일로 회사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했을 때, 나를 그 회사에 입사시킨 사십 대 초중반 쯤의 나의 사수인 ‘차장’ 선배가 나를 말렸다.

세 사람과의 인연

이 회사에 오기 전에 이 ‘차장’ 선배와는 짧지만 굵직한 인연이 있었다. 나는 여의도에 있는 독서신문이라는 곳을 들어갔는데, 1970년에 창간된 신문으로 당시까지만 해도 발행 부수가 제법 되었지만, 지금도 망하지 않고 여전히 발행이 되는 것을 보면, 질긴 생명력을 가진 사이비 신문이다. 우연히 그곳에서 기자모집을 한다는 광고를 보고 필기시험과 면접 등을 거쳐서 들어갔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런 곳에 들어가는데 무슨 시험까지 봐야 하는지 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세 명의 사람들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첫 번째가 나와 동년배인 한 여기자였다. 그 회사에 들어가기 훨씬 전에 내가 어느 창간잡지에서 일할 때 극단 아리랑의 대표와 잘 알고 지냈는데 하루는 그 선배가 천안에 취재할 곳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요청을 해서 따라나섰다가 만난 사람이었다. 그녀를 우연하게도 그 신문사에서 다시 만나다니 천생연분이 아닐 수 없었다. 천안에서 연극을 하는 사람들과 천안 능수버들이 멋지게 휘늘어진 어느 주막(분명히 천안 삼거리였다! 노랫말 가사에도 나온다)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셨는데 그 자리에 연극신인으로 그녀가 참석을 했었다. 아마 그 당시에 대학 4학년생이었던 것 같다. 기억이란 때론 사라지고 왜곡되고 흐려진다. 그러나 여의도에서 재회한 YM을 나는 한눈에 알아봤다. 그만큼 그녀는 예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우리는 나이도 같고 해서 금방 말을 텄다. 활짝 웃을 때 특히 예뻤던 그녀에게 나는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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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사람은 그곳에서 제법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하던, 나보다 세 살 많은 여자였다. 그 선배와는 결혼 후까지도 친하게 지낼 만큼 그 이후에도 인연이 길었다. 그 여자 선배는 결혼해서 나의 딸보다 한 살 많은 아들을 두었는데, 둘을 붙여 놓으면 내 딸이 귀찮아할 정도였다. 얼마나 내 딸을 만지고 뽀뽀하고 그러던지 그 당시에 찍은 동영상을 보면, 내 딸이 울면서 도망을 다닌 장면이 있다. 위의 사진 중 아래 장면이 바로 울기 직전의 표정인 것 같다. 그러나 누구나 비밀 한두 개쯤은 가슴에 품고 산다. 최 선배도 내가 지켜 주기를 바라는 비밀을 갖고 있었고 지금은 그 선배의 가족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껏 지켜 주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비 독서신문사에서 이뤄진 마지막 남은 세 번째 인연이 바로 내가 이 글에서 ‘차장’ 혹은 ‘사수’라고 부르는 사십 대 초중반의 그 사내였다. 그는 당시에 독서신문에서 편집국장 바로 밑의 편집 차장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아마도 이 차장이나 김 차장이었을 것이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당시에는 직위로 부를 뿐,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름을 기억할만한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그는 흔한 성씨를 가졌던 것 같다. 그 사내의 나이는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십 대 초중반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삼십 대 후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의 나이가 헛갈리는 것은 33년 전이라는, 너무 오래전의 일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내 나이의 기준으로 봤을 때, 상대의 나이를 지나치게 많게 봤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어른들의 나이를 실제보다 더 많게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그 차장의 얼굴이 지금도 선하게 기억이 난다. 그의 반듯한 얼굴에는 구레나룻이 많아서 늘 면도를 한 후에 생기는 파르스름한 느낌이 묻어났다. 늦게 오후에는 거무스름하게 작은 털들이 귀밑에서부터 턱 아래까지 짧게 돋아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머리털도 검고 숱도 많아서 머리 스타일이 모델처럼 멋졌으며 눈썹도 길고 짙었다. 키도 당시로써는 훤칠한 느낌이 날 정도로 컸으며 음성도 맑고 힘이 실려 있었다. 요즘 같으면 모델로 나서도 밥을 먹고 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스물셋의 내가 보기에는 그는 아주 능력이 있는 남성으로 보였는데 당시에 사십 대 초중반 정도로 느꼈었다. 그러나 이들 세 명과의 인연이 뒤죽박죽 된 것은 내가 독서신문사에 들어가서 채 적응도 하기 전에 터진 사건 때문이었다.

엉겁결에 쿠데타에 가담하다

어느 날 퇴근 무렵에 긴급 편집국 평기자회의를 한다고 누군가 선포를 했다. 기자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 여기고 사무실을 막 나서려는데 누군가 “강기자, 너도 앉아.”라고 했다. 그 회사에서 아무런 존재감이 없던 나는 그냥 문을 나선다고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이 없었겠지만, 그 바람에 엉겁결에 원탁의 큰 테이블로 다가갔다. 열댓 명의 굳은 얼굴을 한 사내들로 회의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차장이 입을 열기 시작하자 꿈쩍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서서히 상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또라이’ 편집국장에 대한 성토로 가득했다. 편집국장이 얼마나 황당한 짓을 하고 있는지, 그 사람 때문에 편집 데스크가 얼마나 망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성토가 주를 이뤘다. 물론 그것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그 차장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신문사가 편집국장 때문에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내가 보기에도 다들 그의 말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조만간 편집국장을 몰아내는 조직적인 행동이 일어날 것이었다. 회의를 주도하던 그 차장은 회의 말미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 있던 나에게도 한마디 해 보라고 요청했다. “강기자 생각은 어때?” 사실 나는 그 또라이 편집국장이 왜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지, 그가 왜 또라이인지를 말하기 위해 필요한 나만의 기초 정보가 전혀 없이 사람들의 말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들어간 지 겨우 보름 정도 된 나로서 그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나의 관심사는 전혀 엉뚱한 곳에 빠져 있었다. 바로 나의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한 YM한테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였다. 그녀가 잡은 인터뷰 장소에 같이 따라가서 사진을 찍어 주는 등 늘 그녀와 붙어 다녔을 뿐, 다른 것에는 아무런 흥미나 관심이 없었다. 그처럼 나는 그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그녀한테 온갖 정신이 팔렸었으므로 회사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 내가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YM도 그곳에 들어간 지 몇 달 되지도 않아서 나처럼 회사 사정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녀로부터 회사 사정에 대해 전해 들은 바가 전혀 없었다.

“네, 저도 동감합니다.”라고 한마디 한 것이 전부였다. 자신감에 찬 차장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회의는 끝났다. 편집국장이 물러나면 다음 순위인 차장 사내가 데스크를 맡을 것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인사권자인 사장에게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조만간 집단행동에 나설 것이 자명했다. 오십 대 중반의 편집국장이라는 사내는 실력보다는 욕심이나 뭔가를 잔뜩 숨기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하고 있어서 그보다는 이참에 젊고 신수가 훤한 차장이 데스크를 맡게 되면 더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그 작은 회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가벼운 흥분 같은 것을 느끼면서 퇴근을 했었다. 참고로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한 쿠데타라는 말은 프랑스어 coup d’état [ku deta]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갑작스럽게 일으킨 무력행사를 의미한다. 즉,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서 무력을 갑자기 일으킨 것이 바로 쿠데타이다. 코딱지만 한 회사에 그런 단어를 적용한다는 게 좀 우습기는 하지만, 그 작은 세상에서도 사람들의 운명이 갈리는 일이므로 쿠데타라는 단어가 그리 어색한 것만은 아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으므로 월요일에 출근하면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었을지 알 수 있을 터였다. 어차피 나는 신입으로서 어떤 책임을 질 위치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파악을 하지 못할 때였다. 오로지 나의 중심은 고혹적인 미모를 가진, 나의 천생연분 YM뿐이었다.

취조

그러나 월요일에 출근하자마자 공기가 냉랭해진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던 편집국장이 출근하는 나를 직접 편집국장실로 호출을 했다. 아니다. 아마도 출근을 한 지 몇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다.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은 기자들이 편집국장실로 뻔질나게 호출되어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굳게 문이 닫힌 그 숨 막히는 공간에서 편집국장은 취조하는 형사로 돌변해 있었다. 그는 평소에도 눈이 개구리처럼 툭 튀어나와 있어서 언제나 뭔가 다급한 사람처럼 보였는데 눈에는 붉은 핏줄까지 서 있었다. 앞서 미팅에서 한차례 흥분을 했는지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짐짓 태연한 척을 하면서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의 책상 위에는 내 이력서가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나에 대해서 정보를 미리 파악해 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내가 들어가자 자리에 앉으라고 하더니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를 짜냈다. 자기도 나처럼 강원도 출신으로 삼척에서 자랐는데 나의 아버지를 간접적으로 알고 있다면서 내 이력서를 바탕으로 그럴듯하게 자신과 나를 억지로 맞추려고 수작을 부렸다. 그리고 여차하면 나의 아버지에게 뭔가 압력을 행사할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나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농부인 내 아버지에게 제깐 놈이 무슨 해코지를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누구보다 강인한 나의 아버지가 떠 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자와는 처음 대화를 하는 자리였는데 그런 그의 스타일이 싫었다. 주말에 기습적으로 열렸던 평기자회의에서 오간 얘기들이 떠올라서 그가 음흉한 사람이 맞는다는 심증이 굳어졌다. 그는 그날 평기자회의에 참석했던 사람 중 고발자가 있었던지 회의 내용을 자세하게 보고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고 바로 월요일에 회사를 뒤집어 놓을 수 있겠는가? 일요일에도 기자들 몇 명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조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자신이 얻고자 하는 핵심 진술을 제대로 얻어 내지 못했는지 나와 같은 풋내기까지 부른 것이었다. 이런저런 설을 풀던 그 사내는 드디어 나에게 질문을 했다.

“강기자. 그 회의 누가 주동 했지?”

“모릅니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을 했다.

“이곳에 다니고 싶으면 제대로 답변 해! 잘 생각해서 말 해.” 그가 강조를 했다. 나는 그런 자에게 고자질 같은 것을 하고 싶지 않아 입을 꽉 다물었다.

“그 회의에서 자네는 무슨 말을 했나?”

드디어 그가 나에게서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파악을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만일 그 순간에 YM이 떠 올랐다면, 나는 적당히 아부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잘리면 제대로 만나기도 힘들테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늘 내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던 ‘나의 YM’는 그 상황에서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신입이라서 잘은 모르지만, 회의 내용에 저는 동감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날인지 다음 날인지, 아무튼 며칠 만에 편집차장과 나는 회사에서 쫓겨 났다. 다른 사람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므로 국장과 적당히 타협을 했는지 자신의 안전들을 지킨 모양이었다. 다들 차장과 지낸 세월이 있었을텐데 모두들 뒤로 싹 빠지고 오히려 평소에 차장과 말 한마디 섞지 않은 나 같은 피래미 한 명만 총대를 맨 그와 운명을 같이 하게 되었는지, 실패한 쿠데타의 뒷맛은 씁쓸했다. 물론, 당시의 회의에는 남자 기자들만 있었으므로 나를 챙겨 주던 최현정 선배와 나처럼 세상 물정 모르던 YM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었다.

그녀의 자취방

YM은 마포구의 어느 한 동네(한국을 오래 떠나 있으니 이제는 옛날 기억들이 희미하다. 대흥동이나 공덕동 혹은 염리동 정도였을 것 같다. 지금도 그 아이가 세 들어 살던 집과 거리가 생각난다)의 1층 슬레이트집의 길거리 쪽 방을 하나 얻어서 자취하고 있었다. 길가에서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엌이 나왔고 방으로 연결된 문을 열면 자그마한 방 한칸 짜리가 있었다. 내가 그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녀의 방에는 세간살이라고는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살짝만 쳐도 그대로 넘어질 것 같은 비닐로 만들어진 싸구려 옷장 하나가 구석 벽을 의지한 채 덩그러니 서 있었다. 책상 겸 밥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은 동그란 작은 탁자 위에는 아직 펼쳐 보지도 않은 것 같은 새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시골에서 올라올 때 사용했음 직한 작은 짐가방이 세워져 있었고 옷장 근처에는 얇은 이불이 개어져 있었다. 길 쪽으로 불투명 유리로 만들어진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다행히 유리창 바깥으로는 가로 세로로 얽혀진 검은색 철장으로 보호되어 있어서 간신히 도둑의 침입은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회사에서 잘린 탓에 시간이 남아돌았으므로 YM의 인터뷰에도 따라가서 돕기도 하고 가끔 기사를 제대로 마무리를 하지 못해서 쩔쩔매던 YM을 위해서 그녀의 자취 방에서 기사를 대신 써주곤 했다. 어느 날은 새벽까지 둘이서 방에 배를 깔고 나란히 누워서 서로 기사 내용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가 내 옆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 여자애를 바라보며 나는 애만 태우다가 날을 세웠던 적도 있었다. 나는 그런 방면으로는 정말로 숙맥이었다.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도 나는 그녀에게 뽀뽀 한 번 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녀에게 닥친 시련을 미리 알았더라면, 대책 없더라도 일을 저질러서 차라리 동고동락을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한다. 우리는 살아보지 않은 미래를 알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노동법을 들먹이다

그렇게 몇 주를 보내고 있는데 나와 함께 쫓겨난 그 차장 사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하다. 그 당시에 어떻게 연락을 주고받았는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휴대폰은 물론 이메일도 당연히 없었다. 더구나 삐삐도 없었으므로 개인적으로 누군가와 만나려면 몇 가지 경우의 수 밖에는 없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통화하거나 메모를 남기는 방법이 가장 편리했을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만나고자 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다. 만일 편지를 주고받기가 불편하고 더구나 시간이 촉박하면 그냥 무작정 상대방의 주소지로 찾아가서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만일 애써 찾아갔는데 상대에게 다른 일정이 있어서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면, 그런 경우에는 온종일 기다린 보람도 없이 허탕을 치기 일쑤였다. 다행히 주소지에 메시지를 전달할 사람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도 않으면 그냥 쪽지를 남기거나 어쩔 수 없이 재방문하는 수밖에 없던 그런 시절이었다. 당시에 세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집에 자기 전화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집주인과 함께 살 경우에는 염치 불구하고 집주인의 전화번호를 부모님 등 아주 필수적인 사람에게 알려 주곤 했다. 그리고 대부분 수시로 집을 옮기므로 주소 하나만 안다고 사람의 인연이 이어질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 주소도 아는 사람의 집 주소로 해 놓고 실제로는 사는 장소가 다른 경우도 왕왕 있었다. 나 역시 그 무렵에는 정해진 주소나 머무는 곳이 일정하지 않아서 거의 동가숙서가식하던 시절이었다. 나의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독서신문사의 최현정 선배로부터 연락을 받았던 것 같다. 아무튼, 그 차장 선배를 만나니 자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에 취업을 시켜 주겠다고 했다. 예전 회사보다 훨씬 조직도 크고 활기찬 곳이라고 했다. 용산구 청파동 어딘 가에 있었던 것 같다. 기업을 주로 다루는 일간 공업신문사라는 곳이었다. 세상에 공업신문이라니! 일본에 동명의 신문사가 있는데 그 모델을 카피했을 것이다. 일본의 그 일간공업신문은 역사가 100년이 넘은 신문사로 한국의 매일경제와 같은 매체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어떤 형태 든 새로운 것은 무조건 일본 것을 베끼는 시대였다. 나를 그 회사에 취직 시켜 준 그 차장은 자기 때문에 잘린 나에 대해서 미안해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자신을 배신하지 않은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그곳에서 자기가 잘 끌어 줄 테니 둘이서 한번 잘 해보자고 했다.

아무튼, 새롭게 옮긴 그 회사에서도 금방 잘린 계기가 된 사건은 이렇다. 보름 동안 일을 한 것에 대해 회사가 급여를 지급해 주지 않자 내가 회사에 항의하려고 할 때 그 차장 선배는 나에게 잠시만 참으라고 했다. 이번 달은 취직을 한 지 아직 한 달이 되지 않아서 나오지 않은 모양이니 다음 달에 지급이 될 것이라고 했다. 사실 나는 늘 주머니에 돈이 없는 상태로 지냈으므로 버틸 만했다. 더구나 촌지까지 받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동기라고 불러야 할 그 사내 M은 나를 붙잡고 죽는시늉을 했다. 자기는 급여를 꼭 받아야 한다는 둥, 자기 상황이 너무 힘들다는 둥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막상 자기가 나설 용기도 없는 자들일수록 남에게 신세타령을 늘어놓아 타인의 정의감을 부추긴다. 그의 그런 행동은 나보고 대신 총대를 매달라는 뜻이다. 결국, 정의감에 내가 나서서 항의하자, 회사에서는 나를 불러서 M은 그냥 자를 것이라면서 나보고는 다음 월급을 기다리라고 설득했다. 나는 회사의 사장 눈에 처음부터 들었으므로 사실 잠깐 참으면 그냥 그럭저럭 그곳에서 밥벌이를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동기라는 사내 M은 곧 잘릴 상황이었다. 나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 결국 사장실을 노크하고 들어서고야 말았다. 금테 안경을 쓴 사십 대 후반이나 오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사내는 한국일보 기자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한마디로 제대로 훈련을 받은 기자 출신으로 자부심이 높아 보였다. 그는 기사의 방향이나 내용에 대해서 스크린을 하는 등 사실상 편집국장의 권한까지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에게 인사를 했다. 슬쩍 보더라도 깐깐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상의 사내였다. 찔러서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사람의 전형 같았다. 지금도 그 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실제로도 직원들이 그의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나는 자주 목격했다. 처음에 그와 일상적인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나는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내 동료가 급여도 받지 못하고 회사를 나가게 되었는데 이는 노동법상 옳지 않다고 주장을 했다. 나에게서 노동법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는 예상보다 크게 화를 내며 소리를 쳤다.

“뭐, 나한테서 노동법을 들먹여?”

그는 소리를 냅다 질렀다.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벽 너머로 사람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사장실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말 몇 마디를 더하기는 했지만, 우리의 대화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내가 사장실에서 나오니 사람들은 나를 응시했다. 나는 내 스스로가 대단하고 용감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야말로 새파랗게 어린, 그리고 신출내기가 그 회사 사람들이 쩔쩔매는 사장실에 들어가서 자신의 주장을 따질 수 있는 사람은 그곳 어디에도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눈빛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짧은 기간에 그곳에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그렇지만, 신출내기답게 대책 없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불순분자가 되다

다음 날, 그곳의 임원인 듯한 사람이 나를 불러서 회사를 그만 둬야 한다고 했다. 물론, 나는 그 상황에서 그 곳을 다닐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차장은 나를 데리고 커피 숍에 갔다. 그는 사장이 한국신문협회에 나를 블랙리스트로 등록하라고 비서에게 지시했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 줬다. 그곳에 등록이 되면, 아마도 그런 쪽으로는 더 이상 취직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졸지에 언론사에 위장 취업을 해서 불순하게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당시에 차장이 내게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추천한 그 사람에게도 불이익이 돌아갔을 것 같았다. 그는 틈만 나면 나를 현장에 데리고 나가서 하나라도 더 잘 가르쳐 주려고 애썼던 나의 사수였다. 그 당시에는 사이비 언론일수록 사수가 똘마니 한 두 명, 많으면 세 명 정도를 데리고 현장 취재를 다니곤 했다. 커다란 카메라 가방을 메고 사수를 따라다니게 했다. 그래야 취재 현장에서 자신이 데리고 온 똘마니 기자들이 자신에게 굽실거리는 것을 상대에게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체면을 세우고 세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실력이 없으니 쇼라도 해서 그런 것을 연출하려는 불쌍할 인생들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런 것은 종종 잘 먹혀서 비리가 있는 상대에게는 충분히 심리적으로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의 기업들은 온갖 비리를 갖고 기업을 운영했기 때문에 찔러서 털리지 않을 회사들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므로 사세가 조금이라도 있는 기업이라면 기자들이 나타나면 돈을 찔러줘서 적당히 무마하는 게 홍보실의 주요 업무였을 정도였다. 만일 그런 성의가 없으면 기사를 쓴다고 협박하고 돈을 뜯거나 비판적인 기사를 내서 광고를 싣게 하는 게 전형적인 사이비 기자들의 짓거리였다. 그리고 아무리 돈을 받아도 기사는 늘 써야 하므로 기사에 슬쩍 뉘앙스를 풍기는 내용을 넣기 일쑤였다.

그 신문사 회사 직원 중에 지금도 눈에 선한 한 사내가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부장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는 사십 대 후반쯤 된, 하도 잘 먹어서 아랫배가 툭 튀어나와 넥타이가 한 가운데 머물지 못하고 늘 어느 한 쪽으로 미끄러져 굴러 떨어지곤 했다. 그때마다 그는 넥타이를 가운데에 두려고 부단히도 노력해서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사내는 회사에서도 언제나 목소리가 높았다. 자신의 사이비 기사로 후속 광고 실적이 남들보다 높아서였는지 늘 자신감이 넘쳐 있었고 웃음소리도 비정상적으로 컸다. 하는 짓이 꼭 전형적인 사이비 기자 같았다. 실제로 그자는 외출할 때마다 똘마니 몇 명을 꼭 데리고 다녔다. 그런 자들은 안 봐도 뻔하다. 반면에 나의 사수인 그 차장은 점잖았다. 무슨 사연으로 그런 사이비 언론사를 전전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한, 적어도 그런 구조를 바꿔 보려고 쿠데타를 시도하다 쫓겨난 사람이었다. 아, 지금 생각이 난 것이지만, 사장이 나에게 버럭 화를 낸 후에 내가 보름 정도 밖에 근무하지 않았던 독서신문에 연락해서 내 이력 조사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나의 사수였던 그 ‘차장’도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일을 예상해서 그가 나를 말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사수의 말을 듣지 않고 일을 크게 벌린 탓에 그도 나처럼 블랙리스트에 등록되어 그 이후에 업계를 떠났을 지 모른다. 나는 그 이후로 그를 만난 적이 없다. 어쩌면 그도 나와의 인연으로 자랑스럽게 불순분자가 되어 그런 사이비 언론계와 손을 씻고 그에게 걸맞는 새로운 그만의 길을 만들어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픈 청춘들

1986년의 한 때는 나에게 제대로 쓴맛을 보여준 시기였다. 그러나 가장 쓴맛은 내가 한때나마 빠졌던 YM 때문이었다. 나도 생계를 이어가느라 정신없이 바빠서 반년 넘게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최현정 선배를 만나서 원하지 않는 소식을 들었다. 최 선배는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나와서 그 바닥에서는 글을 제법 잘 썼다. 그 사이에 그녀도 독서신문을 그만두고 르포 기자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내가 YM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던 그 선배는 내가 YM의 소식을 묻자,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YM이 변했어. 옛날의 그 아이가 아니야. 신문을 팔려고 몸을 이용한다는 소문도 있어.”

그랬다. 그 독서신문에서 평기자회의가 열리던 날 쏟아졌던 비판 중에서 편집국장이라는 작자가 기자들에게 신문을 팔아서 돈을 벌 것을 강요한다는 것이 가장 큰 불만이었다. 그 신문사의 수익구조는 그렇게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신문에는 광고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도 64쪽이나 128쪽 정도로 발행이 되는 타블로이드 판형이라면 신문에 전면 칼라 광고가 몇 개쯤, 흑백 전면 광고도 몇 페이지 들어가고 제법 굵직한 광고들이 들어가야 수입을 얼추 맞출 수 있을 텐데, 주로 실렸던 5단, 7단짜리 흑백 책 광고 정도로는 결코 수지를 맞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자들은 급여 대신에 결국은 수당을 받아 가는 꼴이었다. 뭐, 기본 급여는 있었겠지만, 나는 그곳에서 급여를 타 보지 못해서 알 수 없다. 수당은 신문을 얼마나 팔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었다. 그곳에 있을 때 가끔 들리는 이야기 중에 누구누가 몇만 부 실적을 올렸다더라 하는 말을 스치듯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정말 그 당시에는 YM에게 빠져 있어서 그런 말들의 의미조차 파악해 보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잠재 취재원을 선정하는 기준은 오로지 인터뷰에 실릴 사람이 신문을 몇 부나 매입해 줄 수 있겠느냐를 따져서 선정할 게 뻔했다. 물론 현장을 뛰는 취재 기자들 말고 편집을 하는 기자들은 각 출판사에서 보내오는 보도자료를 토대로 출판계나 독서계 동정 뉴스를 만들어 내서 신문의 구색을 갖춰 나가서 겉으로 보기에는 사이비 언론처럼 보이지 않게 한다. 따라서 취재기자들은 돈을 낼 만한 인사를 선정해서 인터뷰 기사를 잘 써 준 후에 신문이 인쇄되면 직접 찾아가서 신문을 사 줄 것을 요청하는 식이다. 자기 사진이 그럴듯하게, 큼직하게 인쇄된 기사를 주변에 알려서 뽐내고 싶어 하는 자들은 호기 좋게 몇천 부, 몇만 부를 사는 것이다. 그러면 기자는 그 자들에게 신문을 전달하고 돈을 받아서 회사에 입금한다. 따라서 회사는 광고에 의존하지 않고도 신문을 팔아서 돈을 챙기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독서신문은 주간지(정확하게는 격주간지였다) 중에서 꽤 열독율과 인지도가 높았다. 정기간행물 승인이 거의 나지 않는 그 시대의 이점을 최대한 누린 것이다. 그렇게 사주들은 앉아서 눈먼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광고를 많이 넣지 않으면 오히려 신문의 품위는 더 올라가게 된다. 외부에서는 신문의 정기구독자 수가 많은 것으로 평가를 해 주면서 인터뷰를 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게 된다. 그렇게 그 바닥에서 생존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불쌍한 여기자들이 자신의 몸까지 팔아서 생계를 유지할 때, 그들은 담장 높은 집에서 자기 식구들 잘 먹이고 언론사 사주 행세를 하면서 폼 잡고 잘 살았을 것이다.

나는 최 선배에게서 그런 말을 듣자 가슴이 아팠다. 눈이 사슴처럼 커서 겁이 많던 아이가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안타까웠다. 최 선배 말에 의하면, YM은 월급을 받아서 (정확하게는 수당) 매달 시골에 있는 어머니에게 보내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였는데 수입이 변변하지 않아서 늘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수입이 늘어났는데 눈치 빠른 사람들은 그것이 어떻게 되는 구조인지 금방 안다고 했다. 그 회사에 그런 여기자들이 몇 명 있다고 최 선배가 얘기했다. 그 아이가 결국 그 길을 선택했다면, 다시는 빠져나오기 힘들다고 덧붙여 줬다. 최 선배처럼 기사를 감칠맛 나게 쓸 재주가 없던 YM이 돈을 쉽게 벌기 위해서 제법 돈이 있는 기업의 사장들을 섭외해서 인터뷰하고 기사를 낸 후, 다량의 신문 매입 조건으로 잠자리도 한 것 같았다. 적어도 최 선배는 그렇게 눈치를 채고 있었다. 돈 있는 자들 입장에서는 날씬하고 젊고 예쁜 여기자와 잠자리를 하는 대가로 그 정도의 거래쯤은 나쁘지 않았으리라. 그때부터 나도 예전 자리로 돌아올 수 없는, 그녀와의 달콤한 미래를 접었다. 그렇게 그녀를 잊고 지내던 나는 어느 하루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걸친 후, 매우 늦은 밤에 그녀의 자취방을 찾아갔다. 밖에서 아무리 불러도 방에 불이 커지지 않아서 나는 창문에 작은 돌을 던졌다. 이윽고 방에 불이 켜지고 잠이 덜 깬 얼굴을 한 그녀가 창문을 열었다. 나는 술김에 몇 마디를 했는데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기억하고 싶지 않아 나의 뇌에서 삭제된 것이리라!). 아무튼 그것으로 그녀와는 더 이상 친구 관계도 아닌 채 인연을 끊게 되었다. 늘, 죄 없는 술이 문제이다! 후에 그녀는 연극인이 되었을까? 어쩌면 한국의 미투 운동의 가장 유명한 가해자 이윤택과 같은 연극판의 사악한 사이비들 때문에 그녀도 결국은 연극인으로서도 살지 못했을 것 같다. 80년대 내내 세상 풍파에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야 했던 우리는, 아픈 청춘들이었다. ‘아픈 청춘’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꺼려진 것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 제목이 떠 올라서이다. 나는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검색을 해 보니 이 책의 저자는 서울 출생에 검사를 아버지로 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유학도 갔다 온, 더구나 서울대 출신에 서울대 교수라고 한다. 나이는 나와 같은 63년 생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사용하는 ‘아픈 청춘’은 내가 경험하고 느낀 그 ‘아픈 청춘’하고는 다를 것이다. 그 시대에 YM과 나, 그리고 그때 사회적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수 많은 낙오자들, 실패자들의 청춘과는 무관할 것이라는 것 쯤은 알겠다. 그래서 ‘아픈 청춘들’이라는 소제목을 다는 것에 대해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사이비는 사라지지 않는다

문득, 요즘도 기자들이 사이비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옛날 생각이 나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사이비’라는 말은 사실 틀린 말인데도 한국에서는 언론사나 정부 등의 보도문에서 늘 사용된다. 정확하게는 ‘양아치, 점잖게는 저질’이라는 말을 쓰는 게 맞다. 그래도 ‘사이비’라는 말을 붙이면, 뭔가 신비한 느낌이 나서 더 저질스러워 보이거나 양아치처럼 보이기는 하다. 아무튼, 사이비 기자로서 나는 촌지를 받아 봤다. 나는 분명히 사이비 기자였다. 그런데 그 이후에 내가 수도 없이 목격한 것은 기자들이 노골적으로 돈 봉투를 요구하는 것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영화 기자 시사회에 가 보면, 초대한 기자들의 명함을 받아 꼼꼼히 확인한 후 들여보낸다. 미리 초청된 사람인지 여부도 꼼꼼하게 확인한다. 왜냐하면 그들만의 비밀이 새어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곳에서 영화 배급사 홍보 직원들은 기자들의 영향력에 따라서 미리 잘 계산된 돈 봉투를 준비해 놓고 있다가 영화가 끝나서 돌아가는 기자들에게 언론사별로 미리 표시해 둔 보도자료를 챙겨서 보냈다. 물론, 그 두툼한 서류 봉투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지 뻔하다. 거기에 모인 기자들은 모두 다 알고 있는 한 통속이었다. 나도 기자들만이 보는 시사회에 배급사와 관계된 사람이라는 이유로 몇 번 참여했기 때문에 그런 은밀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영향력이 있는, 특정 위치에 있는 언론사 기자들의 경우에는 남들이 함께하는 시사회에는 참석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신만을 위한 “나 홀로 시사회”를 요구했다. 당연히 그런 자들의 요구는 수용이 되었으며 돈 봉투의 두께는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당시에 큰 흥행이 예상되는 외화라면, 수천만 원까지도 받아먹었을 것이다. 나는 한국을 떠날 때까지 그런 촌지 문화가 없어진 것을 보지는 못한 것 같다.

나도 기획사를 운영하고 영상 교육 기관과 국제영화제 같은 기관을 운영하면서 미디어 기자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촌지를 준 적은 없다. 아예 돈을 줄 만한 재정이 없었으므로 그런 방식으로 접촉을 한 적도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화 담당 기자들은 내가 돌리는, 돈이 안 되는 보도자료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당시에 때가 덜 묻은 기자들이 많이 도와줬다. YTN의 오동진 기자와 디지틀조선일보 영상사업부의 부장이었던 이성복 기자 등이 대표적이었다. 반면에 지금은 조선일보사의 사료연구실장 자리에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영화계에서 활동할 당시에 김명환 기자는 조선일보의 영화담당으로서 차장급이었을 것이다. 영화계에서 얼마나 파워가 대단했던지 다른 신문방송사들의 영화 담당 기자들이 다 참여하는 기자 시사회에는 가지 않고 자기만을 위한 시사회를 따로 요구한다는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그런데 영화계에서 엄청난 파워를 가진 그에게 나는 뜻하지 않게 제대로 찍혀서 단 한 번도 그에게 뉴스 도움을 받은 바가 없다. 내가 1995년에 한국에서는 최초로 국제영화제를 창설한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당시에 김수용 감독이 집행위원장으로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런데 기자회견 전날 저녁에 한국일보의 영화담당 기자라는 자가 전화를 해 와서 참조하려고 하니 보도자료를 팩스로 보내 달라고 했다. 다음 날 기자회견이 있음으로 그 자리에서 보도자료를 배포할 것이라고 설명을 해도 그냥 참조만 할 거라며 자꾸 졸랐다. 할 수 없이 팩스로 자료를 보냈는데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기자회견을 끝내고 사무실에 들어가니 조선일보의 김명환 기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잔뜩 화가 나 있었지만 억지로 가라앉힌 차가운 목소리로 한국일보에 자료를 먼저 보냈느냐고 물었다. 한국일보에서 해당 기사가 나왔는데 사전에 자료를 보내지 않고 서는 쓸 수 없는 것이라며 어떻게 일을 그렇게 하느냐면서 앞으로 협조해 주지 않겠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한국일보 기사를 찾아서 보니 얼마나 급하게 원고를 넘겼는지 영화제 관련 기사가 약간 삐딱하게 앉혀져서 인쇄되어 있었다. 그것도 짧은 단신보다는 조금 긴 기사였다! 나의 뒤통수를 친, 참으로 간사한 기자였다. 공동 기자회견을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얌체 짓을 할 수 있는지. 그게 무슨 특종이라도 되는가? 그 한국일보 기자 때문에 언론사들이 대부분 한국의 첫 번째 국제 영화제에 대한 기사화를 외면했다. 한겨레의 안정숙 기자를 비롯한 몇 명 만이 단신으로 처리를 했다. 그 이후에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조선일보의 도움을 받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그자의 후임으로 이동진 기자가 와서야 조금 가능해졌다. 그런데 이 사람도 자기 사수한테 배웠는지 뻣뻣하기가 돌덩어리 같았다. 조선일보의 김명환 + 이동진 콤비는 당시에 영화계에서 피할 수 없는 산이었다. 이동진은 지금은 그 바닥에서 엄청 유명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다.

그해의 인연들에 감사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자면, 나도 분명히 사이비 기자였다는 사실을 고백하고자 함이다. 내가 받은 50만 원짜리 촌지는 당시 기준으로는 정말 큰돈임에 분명했다. 비록 내가 그 회사에 처음부터 아무런 기대도, 요구도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글을 써 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사이비 언론사에 취업한 사이비 기자였음이 분명했고 촌지를 받고 기뻐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내가 경험한 이 두 곳을 비롯한 수많은 사이비 언론사들은, 실력이나 학벌이 없어서 언론고시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실패자들을 끌어들여서 신문을 팔고, 광고를 따는 수단으로 인력 착취를 했다. 심지어 그런 사이비 언론들은 내가 한때 가슴에 품었던 YM을 이상한 소문까지 날 정도의 나락에 떨어지게 했다. 당시에 신문언론학과 혹은 신문방송학과 출신들의 최고 희망은 중앙 일간지나 중앙 방송국에 기자로 취직을 하는 것이었는데 그러자면 1년에 딱 한 번씩 치르는 언론사별 기자 시험에서 붙어야 했다. 소위 언론고시를 통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은 재수나 삼수하기 일쑤요, 그러다가 응시 나이를 넘기거나 자신의 한계를 깨달으면, 부득이 눈높이를 낮춰서 지방 언론사나 서울의 큰 규모의 출판사에 들어가거나 그마저도 안 되면 월간지, 주간지, 주간 신문 같은 곳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큰 언론사가 운영하는 곳을 빼면 대부분 영세하거나 한심한 수준의 수익구조 때문에 기자들을 영업 일선에 내세워야 먹고 살았다. 코팅된, 사진이 박힌 기자 신분증을 받은 불쌍한 사이비들이 적당히 협박하고 을러서 광고를 수주하고 어두운 곳에서 적당히 협작해서 먹고사는 시절이었다. 나는 언론고시를 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학력 자체를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이력서 한 장으로 눈속임을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사이비 언론사에서 잠깐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외부에서 사이비 기자라고 손가락질을 당해도 가까이서 지켜보면, 다들 어떻게 해서든 자기 식구 먹여 살리려고 죽으라고 뛴 것이다. 산다는 게 슬프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슴 뛰게도 한다.

다행하게도 내가 그런 사이비 기자질을 하지 않게 만들어 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동기 비슷한 그 남자 M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 전에 M이 생각날 때는 그저 한심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 정도만 떠 올랐는데, 비로소 이 글을 쓰면서 그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만일 그가 월급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나에게 그렇게 징징대지만 않았다면 나는 그를 위해 굳이 목이 잘리는 길에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서슬 퍼런 사장에게 노동법을 들먹이면서 대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들어가자마자 그에게 실력을 인정을 받았는데 왜 굳이 그런 무모한 짓을 하겠는가? 만일 M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곳의 생태계에 발을 깊숙하고도 달콤하게 담은 채, 정말로 제대로 된 사이비 기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스물셋의 어린 나이부터 말이다. 그랬다면 나의 인생은 전혀 다르게 풀렸을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에 내가 한겨레신문을 창간하는 데 참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지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길과는 완전히 다른 축에서 걸었을 것이다. 가끔 사이비도 개과천선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으니 또 사람 일은 모를 일이지만. 우리네 인생은 채 가보지 못한, 가보지 않은 길들 천지이다. 그런 와중에 과거, 그리고 현재 걷고 있는 길이 있기까지는 어쩌면 종잇장보다 얇고 가벼운 무수한 인연들이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살다 보면 우리 주변의 인연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어쩌면 나도 나의 사수였던 그 차장이 나를 떠 올릴 때가 있었을 것이다. 마치 내가 M을 떠올렸을 때마다 느꼈던 그 무기력하고 한심한 사내로 M을 기억했던 것처럼, 나의 사수도 내가 세상 물정 모르고 날뛰던 애송이라고 혀를 찼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하여 다시는 언론계에 발을 딛지 못하고 숱한 고생의 길을 걸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M과의 인연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깨달은 것처럼, 나의 사수도 언젠가 나와의 인연을 그렇게 여기지 않았을까? 나는 모르고 있지만, 그는 이미 오래전에 그런 나를 용서해 줬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는 당시에도 충분히 멋진 사람이었다. 지금은 칠십 대의 나이에 이르렀을 그를 한번 만나고 싶다.

사족

이 글을 쓰면서 처음에는 실명을 여과 없이 사용했다. 나의 글은 공개된 블로그도 아니고 검색 엔진을 거부해서 인터넷에 검색이 되지 않게 설정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다. 그래서 글을 쓸 때 누구의 눈치를 볼 일도 없어서 마치 일기처럼 쓰는 경향이 있다. 만일 내 글이 올라가자마자 수많은 검색 엔진들이 달라붙어서 인덱스를 해 버린다면, 나는 글을 자유롭게 쓰지 못할 것이다. 한 번 검색 엔진에 노출되면, 마치 디지털도서관에 납품된 것처럼 영구 보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기가 아니라면, 33년 전의 일이라도 실명을 언급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내가 이 글에서 실컷 흉을 본 사람(들)이 만일 이 글을 본다면, 나에게 어떠한 해코지를 할지 모를 일일 뿐만 아니라 우연하지 않게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인 YM이 이 글을 본다면 당시의 일이 떠 올라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는가? 내가 오랜 경험을 통해서 얻은 것 중에 말과 글은 정말 다르다는 것이다. “말은 주어 담을 수 없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잘못 뱉은 말은 때를 놓치지 않는 한 수습이라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글은 수습이 가능하지 않다. 말은 대화하는 상대방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감지하면서 충분히 조절이 가능하지만, 글은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보내 버리는 구조 탓에 조절이 불가능하다. 말은 대화이므로 상대방과의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서 얼마든지 통제를 할 수 있다. 반면에 글은 일방적이므로 보내는 단신 메시지이므로 그 자체로 결과적이다. 그리고 말은 나의 목소리 톤과 호흡, 감정 등이 입체적으로 담겨 있음으로 상대방이 더 폭넓게 생각할 여지를 준다. 하지만 글은 언어만을 갖고 사용하는 까닭에 매우 직선적이며 차갑다. 그래서 글자를 콜드 글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는 글로 나의 의사를 전달하다가 상대방과 인연을 끊게 된 경우가 여러 차례 있다. 글을 쓸 때, 나는 좀 더 냉정해진다. 상대에게 비수가 될만한 무기를 곳곳에 세워 놓는 경우가 있어서 나의 글을 받아 본 상대는 상처를 크게 받을 가능성이 높다. 올봄에 스페인에서 변호사를 하는 C와의 관계도 그랬다. 그는 13년 넘게 나와 파트너로 일을 해 왔는데 그가 나에게 잘못한 것이 몇 년째 시정이 되지 않자 끝내 내가 그와의 관계를 끊었었다. 나의 차가운 글에 그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내가 지난 7월 20일에 쓴 My New Goal이라는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내가 미국에서 변호사가 되려고 결심하게 된 동기가 될 정도였다(비록 꿈에서조차 그렇게 암시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는 그 사건이 아무래도 연계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난 9월에 그를 다시 만나 진실한 대화를 통해 예전의 관계를 회복했다. 예전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았을 텐데 인생을 좀 살아보니 사람 사이의 인연을 그렇게 단칼에 정리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좀 번거롭더라도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수록 글보다는 말로 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다. 다만, 술 먹고 하지는 말지어다. 상대에게 비수를 꽂는 말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대가 미워도 비수를 꽂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인생을 좀 살아보면서 새록새록 느낀다. 인생은 유한하고 인연은 그만큼 소중하다.

업데이트: 2021년 8월 30일

이 글의 제목을 “나도 한때 사이비 기자였다”에서 이 글의 중간 제목인 현재의 제목으로 변경했다. 요즘은 시간이 날 때마다 내 글들을 영어로 번역을 하고 있는데 다시 글을 읽다가 제목을 변경하게 되었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사이비 기자들 때문에 처음에 그렇게 제목을 달았지만, 내가 한 때 마음에 품었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기에 너무 어울리지 않았고 너무 예리한 칼날 같아서 베일 것 같아서이다. 추억을 꺼내 볼 때 너무 아픈 것만 들여다 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가 아직도 창창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