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스캔하다 – 들풀모임

2017년 8월 14일 이른 오후다. 나는 며칠 째, 그러니까 지난 8월 6일부터 추억을 스캔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전 캐논 9000F Mark II이라는 모델을 하나 장만해 놓고 본격적으로 내가 보관하고 있던 인화된 35미리 필름들을 스캔해서 디지털 파일로 만드는 작업이다. 4800 dpi로 만들고 있는데 9600 dpi까지 화질을 높일 수는 있지만, 이미지 파일 한 개의 사이즈가 34 메가 바이트를 넘기 때문에 대신에 그것의 1/3 수준인 4800 dpi로 작업 중이다. 현상된 필름을 두 개의 릴에 삽입하고 초기 스캔을 하면 촬영 된 이미지들을 자동 지정을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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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이미지는 9~13 메가 바이트 정도로 만들어진다. 10장의 이미지 파일로 전환하는데 약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먼지나 스크래치, 필름에 변색이 생긴 것도 어느 정도 자동으로 조정을 해 주기 때문에 좋다. 한 번 스캔 명령을 내리고는 주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옆에서 내 할 일을 하고 있다가 스캔이 끝난 것을 알아 차리면 다음 필름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필름 전환 작업은 벌써 열흘 정도가 지나고 있지만, 사실 심심풀이 땅콩 같은 일이지만, 여력이 날 때만 한다. 그러나 사실 아주 꾸준히 하고 있다.

잊혀진 추억으로의 여행

그런데 이렇게 작업을 며칠 째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사진을 보는 경우가 있다. 디지털 카메라가 없을 때였으므로 나의 이십대부터 2003년 정도의 시기 같다. 그리고 나의 이십대 혹은 삼십대 사진들은 결혼 전과 결혼 후로 다시 나뉜다. 결혼 전에는 집에 내려가서 부모님 등과 찍은 사진들, 직장이나 친구들과 찍은 사진들이 간혹 발견된다. 결혼 후에는 첫째가 태어나기 전과 후로 확연히 나뉜다. 아이가 없을 때에는 사진이 그리 남아 있지 않다. 신혼부부로서 둘이서 찍은 것은 몇 장 남아 있지만, 양가 가족과 찍은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일과 관련하여 남은 사진들은 영화제, 워크숍 등 많은 사진들이 있을 것 같다. 아직은 본격적으로 그런 필름을 스캔하기 전이라서 그렇지만.

그리고 딸이 태어난 직후부터는 사진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었다. 아무래도 사진은 어린 아이들을 기록하는 유용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경제적인 사정으로 인화를 한 후에 잘 된 것만 선별적으로 사진으로 뽑았으므로 사실 많은 장면들은 이번에 처음 보는 것들 같다. 이렇게 빛과 그림자로 남겨진 채 수십 년을 서랍에 갇혀 있다가 비로소 세상에 빛을 보게 되는 나의 추억들과 만나는 것이 설레이는 요즘이다.

새재 넘어 문경

위의 글은 오늘 오후에 잠깐 썼던 글이다. 나는 이 글을 일부 쓴 후, 적당한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가 조금 전(2017년 8월 14일, 밤 11시 50분 경)에 스캔이 막 된 사진을 훑어보다가 깜짝 놀랐다. 내가 경북 문경에 잠시 내려가서 한겨레신문과 관련하여 일을 하던 시절의 사진들이었다. 그것도 단 한 장의 사진도 남아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뜬금없이 두 녀석을 발견한 것이다. 이상렬과 김기호다. 아마도 누군가의 결혼식장에 참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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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이상렬이다. 건국대 재학 중에 군대를 갔다왔고 복학할 무렵일 것이다. 그리고 평통사무실에서 여사원으로 근무하던 김남희와는 사총사처럼 어울려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1988년도 사진이다.

들풀모임

도대체 이 필름 통에서 어떤 사람들이 나타날지 궁금하다. 지금 나머지들도 스캔 중인데, 정말 궁금하다. 그곳에서 내가 조직한 들풀모임 회원들인 것 같다. 지금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마도 이 필름들은 내가 그곳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사진들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나는 문화활동 모임을 조직한 후, 강좌위원회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그곳에 머문 약 1년 동안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중의 하나는 서울의 프로 연극팀을 데려다가 연극공연을 한 것이 기억난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쥐덪]이라는 작품이 이대 앞의 청파소극장에서 한창 공연될 때였다. 나는 그 전에 연극 분야의 사람들을 조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출을 맡고 있던 김정숙씨를 찾아가서 그들이 공연을 쉬는 월요일에 지방에서 공연을 하자고 제안을 했다. 무대는 우리가 현지의 극장에 일요일 밤 영화 상영이 끝나면 밤새도록 공사를 해서 세팅을 하겠다고 했다. 당시에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나는 점촌시내에서 실내 인테리어 디자인 가게를 하는 사장을 데리고 갔었다. 그도 우리 회원이었다.

연극공연

그래서 서울 본공연이 쉬는 하루를 이용해서 지방 공연을 동시에 하는 사상 초유의 일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던지. 연출가 김정숙 씨의 요즘 근황이 어떤가 싶어서 검색을 해 보니, 경향신문에 여성연출가 열전극단 ‘모시는 사람들’의 김정숙씨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어서 반가웠다. 아주 최근 소식에는 더 반가운 내용도 있었다. [브라보가 만난 사람]연극 연출가 김정숙, 연극은 결국 사랑이다!에서 최근의 그녀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이 연출가와는 월간 잡지 내고장소식에서 기자로 있을 때인 1984년이나 1985년에 만났을 것이다. 그때 내 나이가 한국 나이로 스물 둘이나 셋이었을 때였다. 연극 관련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당시에 나는 잡지사 사장이랑 회사 근처인 마포 사거리에 있던 한 여인숙에 방 하나를 잡아 놓고 지내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아침에 숙소 문을 열고 나서다가 대청마루 건너 편에서 막 나서는 김정숙씨와 내가 잘 알고 지내는 다른 남자 연출가와 딱 부딪혔다. 하하… 잠깐의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그들은 결혼을 하지 않은 성인들이니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아무튼, 700석 규모의 극장에서 월요일 하루 동안 2회 상영을 하는데 우리 회원들이 판매한 티켓은 2천장이 넘었다. 그래서 좌석에 앉지 못한 관객들은 뒷편에서 서서 연극을 봐야했지만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청량리역에서 밤새 기차를 타고 내려 온 배우들은 그 많은 관객들이 보내 주는 반응에 너무나 감격들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후 서울에 올라가 다시 그 극단 사람들을 만나서 12월 31일 밤을 함께 보냈다. 맥주잔을 부딪히면서 막 새해가 될 때 김정숙씨가 외쳤다. “아, 좋다! 드디어 서른이야!” 나보다 세살 정도 위였을 그녀는 이십대가 지운 무게 때문에 힘들었는데, 드디어 서른이 되었으니 자유롭다고 외쳤다. 나는 그때 그녀로부터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2016년에 권지현 기자가 쓴 [브라보가 만난 사람]연극 연출가 김정숙, 연극은 결국 사랑이다!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었다.

“연극 연출가 김정숙(金貞淑·56)에 대해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들었다. “그녀를 존경해”, “멋있어”, “사랑해”.

‘김정숙’이란 이름이 거론되면 하나같이 천사를 만난 경험담(?)을 쏟아내곤 했다. 한 번쯤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기회가 없었다. 새뮤얼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끝까지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씨처럼. 만나보자.”

강단으로 위기를 넘다

새재 넘어 촌 동네에 만들어진, 몇 개월도 되지 않은 들품모임은 서울의 현역 프로 극단을 섭외해서 공연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문경, 예천 지역에서 연극공연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소극장은 서울에만 집중되었거나 대도시에 가끔 있을 정도였으므로 충분히 그럴만 했다. 당시에 내가 그런 계획을 제시하자 어느 누구도 내 의견에 동의하지 못했다.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비용, 장소 섭외, 홍보, 티켓 판매, 연극단 섭외 등 어떤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구체적으로 방법을 설명하고 극단을 섭외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므로 그것은 내가 나서서 해결을 하겠노라고 했다. 섭외를 한 이후에 우리 모임 회원들은 티켓 판매를 위해서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안동라디오 방송국에도 회원인 김남희가 출연했으며 멀리 예천에까지 홍보를 했다. 각 회원들이 각개 전투식으로 티켓을 사전 판매하였다. 당시에 점촌에는 삼일극장인가 하는 영화극장이 있었는데, 예전 극장들의 전통대로 무대가 있어서 공연이나 이벤트 등의 장소로도 쓰였다. 우리가 서울 무대에서 보고 온 것을 바탕으로 실내 인테리어를 담당하던 팀원들이 밤새도록 무대를 설치했는데, 하나씩 무대가 설치되어 가는 과정은 정말 대단하고 멋진 일이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점촌시청(당시에 시였는지 읍이었는지 모르겠다)에서 공연을 막고 나선 것이었다. 공연 사전 신고가 안되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배우들과 관객들이 입장을 하지 못한 채 공연은 지연되고 있었다. 나는 책임자로서 공무원들에게 필요한 서류들인 공윤의 심사필 공연 서류를 보여줬다. 서울극단 측이 가져 온 대본과 심사필 서류였다. 하지만, 자신들은 이곳 장소에서의 공연은 신고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안된다고 우겼다. 시간은 지체되었는데, 그들의 논리는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장소마다 신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 대본과 공연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은 이상 장소는 의미가 없다며, 이 공연은 현재 서울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므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반박을 했다. 그렇게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한 시간 정도가 지체되어 나는 문을 열어 공연을 시작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대신에 공무원들에게는 사후 책임은 내가 질테니 내일이라도 필요하면 나를 부르라고 호통을 치며 문을 가로 막고 있던 그들을 밀어냈다.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공연이 시작되었다.

불가능할 것 같은 공연을 성공적으로 유치하면서 우리 회원들의 모임에 대한 열기는 대단했다. 매일 꾸준하게 회원들이 가입을 신청해 왔다. 고등학생에서부터 대학생, 휴학생, 재수생, 현지의 직장인들이 관심을 보였다. 내가 처음 이 모임을 생각하게 된 것은 김남희라는 여성 때문이었다. 시청 한 귀퉁에 있는 평통사무실에서 사무를 보던 김남희는 나보다 두어살 아래였다. 여러 차례 신문 배달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몇 번 방문을 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참, 재미 있는 사람이었고 똑똑했다. 그런 곳에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여성이었다. 이 친구와는 그 후에도 서울에서 밀접한 친분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 친구와 대화가 통해서 그녀가 아는 몇 사람과 어울리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바로 김기호, 이상렬 등이었다. 우리 넷이서는 참으로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 그래서 모임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나는 A4 용지에 타자기로 쓴 모임 창설을 알리는 글을 써서 마스터 인쇄를 했다. 그리고 공설운동장에서 어떤 행사가 열릴 때에 인쇄된 전단지를 나눠 줬다. 내 취지에 공감한 젊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펑퍼짐한 동네 아낙네의 뒷모습에서…’라는 문구로 마무리를 한 것 같은데,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준 것 같았다.

이 사진은 우리 회원의 결혼식 날 같다. 사진을 보니 그리덥 사람들이 하나씩 떠 오른다. 그들의 환한 얼굴들이 희미하게 나마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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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사진을 보니 생각이 난다. 한복을 입은 신명숙씨는 나보다도 나이가 좀 더 많았다. 우리 모임의 열성적인 회원이었으며, 한 때 한참 어린 김기호를 대놓고 좋아해서 우리가 얼마나 재미 있어했던지. 기호는 그런 상황이 난처해서 우리에게 늘 놀림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나처럼 이곳 출신이 아니었지만, 이곳 지역의 가게를 하는 최 아무개와 결혼해서 정착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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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그 당시의 사진을 보면, 당시에 유행했던 스타일을 볼 수 있다. 안경, 옷차림, 머리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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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강선일 씨도 사진으로 만났다. 스캐너에 걸어둔 필름이 디지털로 변환을 하는데 약 40분 정도가 되어야 필름 내용을 알 수 있어서 글을 쓰는 동안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이 글을 쓰는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 당시에 제일 규모가 큰 약국이었던 점촌약국에서 고용 약사로 일을 하던 강선일 씨는 우리 모임에서 최연장자로서 활동을 했다. 무면허 약사였던 그는 우리 모임에서 활동을 했는데 나는 그에게 회장을 맡으라고 부탁을 했다. 그후에 그는 약국을 그만두고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 새로운 인생을 연것으로 알고 있다. 몇 년 후, 그가 언젠가 나로인하여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며 진심으로 나를 존경하며 감사한다는 편지를 해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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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을 입은 김준기라는 학생도 기억 난다. 동국대 불교학과를 다니던 학생이었는데, 나에게 늘 많은 고민을 털어놨다. 시인이 되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 불교에 귀의해서 스님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그는 큰 선택의 길목에서 괴로워했다. 그가 그 후에 어떤 선택을 했을지 궁금하다.

이날의 필름은 36장용으로 2통이 되는 것 같다. 여기에 담겨 있는 사람들은 고스란히 내가 당시에 추억을 공유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될 것이기에 즐겁고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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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보고서야 내가 당시에 “송년문학의 밤”을 진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 몇 장의 사진에서는 우리 회원의 결혼식인가 생각했는데, 송년회를 겸한 모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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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문학의 밤

스캔이 진행되면서 사진 촬영 순서대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 수가 있게 되었다. 결혼식 장면이 아니라 1988년 겨울, 들품모임의 송년 문학의 밤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들고 있는 “들풀이여”라는 제목의 문학지가 보인다. 이것은 내가 도서출판 배움터라는 출판사를 설립해서 출판한 첫번째 간행물이기도 하다. 나는 당시에 그곳의 시청에 출판사 설립 신고서를 제출했지만 문화공보과에서 내 전력을 내세워 출판사 설립을 지연시켰던 일이 생각난다. 내가 한겨레신문사의 현지 지국장으로서 문경군과 예천군, 그리고 상주 일부지역을 관할하면서 좌경스러운 들풀모임을 조직하며 지역 활동을 하는 나를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더구나 그 지역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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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출판과 표현의 자유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법치국가에서 설립허가서를 내 주지 않을 방법이 없었으므로 도서출판 배움터라는 출판사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그해 들풀모임의 첫 송년모임을 기념하여 회원들의 문학 작품과 들풀모임의 여러가지 활동들을 담아 발간했던 것이다.

한겨레 창간과 함께

처음 이 모임을 조직하던 때가 생각난다. 그러니까 한겨레신문준비위원회가 안국동의 안국빌딩에 들어섰을 때부터 인연이 시작되었다. 1970년대의 유신 군사독재 시대에 엄격한 언론통제가 시작되면서 월갑 잡지는 커녕 신규 신문사 등록이 전면금지되었다. 그리고 동아일보 언론인 대량 해직 사태가 벌어지고 조선일보에서도 기자들의 대량 해직사태가 벌어졌다. 그들은 언론사에 복귀하지 못한 채 출판사를 차리거나 다양한 분야에서 생계를 유지해 나가면서 복귀위원회를 조직해서 친분을 맺게 된다. 그러다가 1987년 민주화 혁명과 함께 헌법이 개정되면서 언론사의 설립이 자유롭게 되었다. 70년대 당시에 해직된 언론인들이 세운 신문사가 한겨레였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해임된 송건호 씨가 초대 발행인 겸 사장으로 선출되었다. 나는 당시에 주주로 참여를 하였지만 직접적인 관계는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내 친구 K의 형님이 이 신문사의 지국을 운영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다. 그래서 그 형님의 부탁으로 내가 실제 지국장으로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그 전에도 안국동빌딩의 준비위원회 사무실에 자주 들렸다. 그 후 며칠 간 이뤄진 한겨레신문 전국 초대 지국장 합숙 교육에 참여를 했다. 그곳에서 내가 아르바이트로 신문배달을 할 때 조선일보 영동지역 부장이던 사람도 만났다. 독립을 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조선일보가 첩자로 잠입을 시킨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로 의아스러웠다. 왜냐하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나 그 취지에 공감하여 참여를 했는데 한국에서 최대 규모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그 보급소의 부장이 왜 신설 신문사의 일선 지국장을 하려고 했을까. 그것은 현장 교육 내내 내게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도 거의 6-7년 만에 만난 나를 알아 보고 놀라는 눈치였으나 우리는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는 데모할 때 단골로 사람들이 부르는 많은 노래들 중 어느 한 소절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합숙이 끝날 즈음에는 그도 남들처럼 주먹을 움켜 주고 제법 포즈를 취하게 되었다. 나는 그가 변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집단 사상 교육이란 무섭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룹 워크샵에서는 풍부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유익한 팁을 많이 주었다. 아마도 당시에 그곳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 그만큼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가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사십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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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4월에 나는 경북 문경군 점촌시에 내려 갔다. 5월 15일에 창간지가 나오기 전의 보름 동안은 일종의 테스트로 소식지를 만들어서 독자들에게 배포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 지역의 사정을 이해해 나갔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겨레신문의 독자가 되어 줄 것을 권했다. 어떤 경우에는 많은 시간을 들여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그들은 문화적인 갈증을 많이 느끼고 있었다. 특히 젊은 층에서는 새로운 바람에 대한 막연한 기대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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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촌지국 – 4개의 분국을 두다

한겨레신문은 완전한 가로쓰기 한글에 당시에는 어느 신문에서도 볼 수 없는 맑고 투명한 논조의 기사들로 채워져 있었다. 어느 날 예천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하시는 김창환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그 당시에는 전교조가 막 태동해서 전국 일선 학교 교사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킬 때다. 한겨레신문은 민족정론지를 기치로 창간을 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운동권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그들의 편으로 여겨졌다. 당시 성균관대학교의 재단이었던 봉화그룹의 주축 사업장 중의 하나였던 문경 마성의 탄광 파업 현장에도 취재를 하러 밤 중에도 가야했다. 그곳에서 일을 하는 탄광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한겨레신문 독자였으므로 파업 관련하여 문제가 발생하면 한 밤 중에도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무조건 오라고 요구를 하곤했다. 나는 그들의 소식을 기사로 적어서 송고를 하곤했다. 그곳은 지국이 있는 점촌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으므로 분국을 두어 운영을 했는데 서울 양평동 인쇄공장에서 첫 신문이 기차로 운송되다가 문경군 마성역에서 한 뭉치를 떨궈 주고 점촌으로 내려 왔다. 그곳에 마성분국이 있었다. 김창환 선생님은 나를 찾아와서 자신이 예천에서 한겨레신문을 보급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그 분에게 예천군의 분국을 운영하시게 했다. 그리고 상주시에도 지국이 별도로 있었는데, 점촌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함창읍과는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다. 그곳에까지 상주지국이 신문을 보급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그곳에 살면서 점촌시내에도 일일학습지를 맡아서 하는 내 또래의 청년이 찾아와서 자신이 함창지역 신문배달을 맡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 청년에게도 함창읍의 분국을 맡게 했다. 처음에는 상주지국장과 약간의 마찰이 있었으나 곧 해결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지국은 3개군에 4개의 분국을 둔 유일한 지국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모임의 성격을 잘못 파악하고 가입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운동권에 있던 학생들이었는데 고대에 재학중이던 김한수나 노아무개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모임이 순수한 지역 문화모임이 되기를 바랐으며 그 어떤 이념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운영했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그야말로 순수한 사람들이었으므로 건강하고 밝고 미래 지향적인 모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후배들도 나의 방향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고 적극 협조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모임이 건강성 유지해야 지역 문화 발전에 제대로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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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사이다, 환타. 그 당시에 우리에게 익숙했던 음료수들이다. 사진을 보면, 시내의 어느 예식장을 빌려서 행사를 하고 뒷풀이까지 한 것 같다. 그런데 정작, 나는 왜 이 일이 희미하게 밖에 기억이 나지 않을까? 당시에 내 나이는 만으로 스물다섯이었다. 황금 같은 시기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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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스캔하는 일은 계속 진행 중이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까맣게 잊고 있던 지난 날들이 사진으로 선명하게 나타나는 놀라운 경험을 요즘 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날의 모든 순간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비록 한 순간의 빛으로 멈춰진 순간들이지만, 그 순간들을 함께 했던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절절했던 나의 이십대 시절에 함께 한 소중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지금 어디에선가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보고 싶은 사람들, 들풀모임 사람들. 1988년과 1989년 초에 내가 머물었던, 새재 넘어 한 작은 시골 도시 점촌과 문경, 예천에서 만났던 사람들, 무려 30년 만에 나는 그들과 즐거운 재회를 했다. 멋진 일이다.

wusuk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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