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외 선생

80년대 중반의 어느 날 오후, 나는 간단한 학습교재를 들고 서울 서초구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나는 한눈에 그곳이 고급 아파트 단지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주소를 찾아 초인종을 누르니 문이 열렸다. 남자 고등학생이었다. 그 집에는 그 아이 혼자였다. 이상했다. 일반적으로 과외를 하러 어느 집을 방문하면, 첫날에는 예외 없이 학생의 부모가 그들의 과외선생을 맞이한다. 학부모는 새로 과외 선생을 채용할 때마다 간절한 희망을 갖곤 한다. 그들의 아이의 학업 성적이 빠른 기간 안에 놀랄 정도로 향상되기를 바라기도 하며 과외 선생이 그들의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를 바란다. 만일 과외 선생이 한국 최고의 명문대학교들의 재학생이나 졸업생이라면 그런 과외 선생은 그 시장에서 인기가 높고 그만큼 급여도 높다. 따라서 학부모는 채용전에 인터뷰할 때 지원자의 뒷배경과 함께 얼마나 많은 좋은 결과를 거뒀는지 여부를 면밀하게 확인한다.

과외 급여는 한 달에 한번씩 현금으로 받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구두 계약은 매달 이뤄지는 방식이다. 따라서 어느 일방이 계약을 파기하고자 할 경우 급여를 주거나 받을 때 의사를 밝히면 된다. 어느 날, 학부모가 급여 봉투를 건네면서 “선생님, 죄송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어서 수업은 오늘까지만 하겠습니다.”하면 그것으로 끝난다. 마찬가지로 과외선생이 학부모에게 이렇게 말을 하면 둘의 관계도 정리가 된다. “죄송하지만, 저에게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제가 더 이상은 댁의 자녀를 지도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시장에서 어느 일방이 우월한 입장에 있다고 볼 수 없지만 명문대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하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불리한 입장이다.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능하면 서울대를 비롯한 소수의 명문대학들 합격을 왜 간절하게 원하는에 대한 이유를 이런 상황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 한국 사람이면 이런 상황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이야기지만, 그런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간력하게 추가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작은 국토 면적과 마땅한 자원이 없는 한국으로서는 대학과 같은 고급교육에 집중하는 것이 국가적인 전략이기도 했지만 모든 한국의 부모들의 바램이기도 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과거제도가 있었는데 양반(지배계층)이면 누구나 국가공무원 임용 시험에 응시했다. 만일에 몇 대에 걸쳐서 합격하지 못하면 그 집안은 양반의 자격을 상실하고 평민으로 전락했다. 그 제도는 무려 조선왕조시대 500년동안 지켜져 왔다. 그후 36년간의 일제로부터 독립하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은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했지만 오늘날의 경제적 문화적 성과를 포함한 전분야에서 성공한 것은 절대적으로 한국인들이 오랜 역사동안 유지하고 있던 교육에 대한 높은 기준 덕분이다.

한국인들에게 교육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요즘에도 한국의 교육 열정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최고 낮은 문맹률과 가장 높은 대학 진학률 등의 수치가 우연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모든 부모들은 그들의 자식들이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기꺼이 많은 댓가를 치뤘다. 1908년대만 하더라도 남한의 경제 발전이 괄목하지 못한 까닭에 좋은 일자리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일자리에는 소수의 명문대학 출신들이 독식하는 경향이 매우 높았다. 따라서 학부모들은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가능하면 그들의 자녀들이 명문대학을 졸업하는 것을 갈망하게 되었다. 만일에 그들의 자녀들이 학교 수업 이외에 추가로 과외 수업을 받을 수 있다면 대학 입학 시험에서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으므로 일찌기 남한에서는 개인 과외 시장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그렇지만 부모와 과외교사 간의 계약은 구두로 체결될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해지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거래가 되는 개인 과외 교육 시장이지만 한국에서는 그 규모가 매우 크다. 2001년 9월 19일자 Economy21.co.kr에 따르면, 한국의 사교육 시장 규모가 국민총생산의 7% 내외인 30조원대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같은 시기에 한국 교육부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사교육 시장 규모는 연간 14조원 가량이라고 한다. 이처럼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이유는 당사자간에 이뤄지는 은밀한 사적 거래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개인과외로 수입을 얻기 위해서는 개인사업자를 등록해야 하는 법이 시행되면서 그 시장 규모가 과거에 비해 보다 투명해지고 있다. 2014년에 한국의 고용노동부의 학술 연구용역으로 발표된 “정규근로자 이외의 직종(과외 등)에 대한 직업 소개의 실태조사와 법 적용방안 연구”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한국의 사교육 시장의 규모는 약 40조4천3백13억원이라고 한다.

나의 이 글의 배경은 내가 20대 초반이었던 80년대 초중반이다. 한국의 80년대부터 90년대 초중반까지, 이러한 개인 과외시장에서 대부분의 근로를 담당한 사람들은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던 가난한 대학생들(학부, 석사,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그 이후부터 그 시장의 규모가 더욱 커지면서 사설 학원교사나 성인들 중에서 전업으로 개인이나 그룹 과외만에 집중하는 전문직 그룹이 출현하였다. 위의 학술연구에 의하면, 2008년 기준으로 한국에는 약 21만 명의 전문과외 교습자와 18만 명 정도의 대학(원)생 교습자가 있다. 그리고 이들의 연간 총 수입은 약 2조5천2백6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그만큼 한국의 과외 교습 시장은 그 규모가 크다. 한국에서 유치원에 다니는 나이에서부터 고등학교에 다닐때까지 과외 학습을 받아 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일반적인 현상이다. 거기에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여러가지 필요에 의해 다른 형태의 개인 과외 시장과 연결되어 있다. 개인 과외는 1:1에서부터 1:4 등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수업료는 학원과 같은 시설보다 훨씬 비싸다. 그러므로 가정의 수입이 높을수록 1:1 수업을 선호할 뿐만 아니라 모든 교과목별로 교사를 채용하여 학습 효과를 더욱 극대화할 수 있었다. 반면에 소득 수준이 낮은 가정일수록 1:4와 같은 그룹의 과외를 선택하고 영어나 수학 등 특정 과목에 한정할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대학입학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아무튼 나는 이 새로운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그 고등학생이 사는 집을 방문했지만, 처음부터 모든 것이 이상했다. 나는 그 학생의 부모를 사전에 만난 바가 없다. 나는 어느 날, 어느 학습지 회사에서 부장으로 근무하는 한 남자의 부탁을 받아 내가 그 학생을 지도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소년의 부모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나는 예상했었다. 그런데 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 학생 혼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한 상황이 발생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연 때문이다.

“좀 만날까?”

알고 지내는 한 선배가 내게 전화를 해 왔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중앙대학교에서 연극 연출을 전공한 그를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아리랑’이라는 극단의 대표였다. 당시에 영화와 연극학부와 대학원 중에 중앙대학교는 한국 최고의 학교였다. 그런 대학 출신이라는 점과 한 연극극단을 이끌고 있는 자신에 대해 그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는 그 당시에 강남을 중심으로 새롭게 부상한 신흥 학습지 회사의 부장 타이틀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신사복 차림의 그를 처음 봤다. 내가 기억하던 그는 좌우로 흘러 내리는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거나 머리를 뒤를 향한 채 좌우로 뒤로 살짝 흔들어 정돈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그는 단정하게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말끔하게 수염을 깍은 상태였다. 그는 늘 자유분방하게 옷을 입고 외모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이제 그는 완전히 전형적인 직장인의 외모로 변해 있었다. 사실 그의 느닷없는 변신은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완벽한 변신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눈을 통해서 그가 생계를 위해 자신의 꿈을 꺽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외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가난한 연극연출가로 살기에 그 시절은 매우 어렵고 외로운 길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무렵의 한국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여전히 후진국이었다. 특히 연극계는 관객 규모가 매우 제한적이었으므로 그를 포함해서 연극인들의 삶은 대부분 매우 곤궁했다. 오죽하면 그가 연극판을 떠나 학습지의 세계로 들어갔을지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변신 덕분에 어쩌면 훗날 큰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잡지사 취재 기자인 나의 명함을 건네주고 그가 자신의 명함을 나에게 건네주었었다. 지금은 그의 성이 김이라는 사실과 그가 아리랑이라는 극단의 대표라는 것은 기억난다. 그는 180센티가 넘는 키에 예수 그리스도 역에나 적합할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학교생활 중에 ‘지저스 크라이스트’ 연극 공연이 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주역이었을 것 같다. 그는 오뚝한 그의 코, 갸름하고 긴 그의 얼굴, 눈두덩이가 서양인처럼 깊게 파인 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조상 중에는 서양인 쪽의 피를 받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서구적인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변함 모습에 약간 놀라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나, 취직했어. 어느 학습지 회사인데 강남에서 인기가 높은 곳이야, 강남 부자들 세계에서. 너도 그곳에서 나랑 같이 일할래?”

Kim은 내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나에게 쓸쓸하게 들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나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이 그는 나를 보자고 한 목적을 이야기했다.

“일단, 네가 한 녀석을 좀 맡아줄래? 그는 고교 2학년인데 그의 아버지가 목사야.”

Kim은 간단하게 그 사유를 설명했다. 그 학생은 자신의 팀이 맡은 고객 중의 한 명이었다. 그의 팀원들이 그 학생을 일단 한 번씩 가르친 후에는 모두들 그 학생의 지도를 포기하곤 했다고 그는 나에게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가 일하고 있는 회사는 학습지를 발간해서 판매하지만 고객의 요구에 따라서는 개별 개인 과외를 지원하는 시스템이었다. 그의 팀원들이 그 남자 아이의 지도를 모두 포기했다면, 분명히 그를 다루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Mr. Kim은 내가 풍부하고 성공적인 과외 경험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나를 찾아 왔다. 나는 그 쥬니어 학생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비록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지만 그런 리스크를 내가 맡아 보기로 결심했다. 높은 수업료 역시 내가 결정을 하는데 한몫했다. Kim에게 “그 괴팍한 학생을 제가 한번 맡아 보겠습니다.”

너무나 오래전의 일이라서 그 학습지의 브랜드가 나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회사는 빨간펜으로 유명해진 (주)교원이었던 것 같다. 이 학습 브랜드는 그 이후 꽤나 유명해졌던 것 같다. 내가 한국을 떠난지 오래되어서 과거의 기억들이 더 잘 기억나지 않는 것 같다. 한국에서 계속 살았다면 좀 더 많은 기억들이 남아 있을텐데 아쉽다.

나는 거실의 창문을 통해 녹지 공원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거실에 있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그 녀석과 마주 보고 앉았다.

“부모님은?” 내가 물었다.

“외출했어요” 그 아이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분명히 그 날은 일요일이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일요일마다  예배를 위해 교회에 간다. 더구나 그 학생의 아버지는 목사이므로 그의 아내와 함께 교회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의 부모는 일부러 나를 피했을지도 모른다, 매번 과외선생이 바뀌다보니 지겨워져서. 어차피 다음 과외 선생도 곧 그만둘 것임을 그들은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나의 입장에서도 그의 부모를 만나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나는 나의 수업료를 그의 부모로부터 받는 게 아니라 그 학습지 회사가 나에게 지급할 것이었다.

나는 학습지 회사에서 미리 준비해 준 교재를 펼쳐 놓고 수업을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그 녀석은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그는 상대방을 철저하게 무시함으로써 이미 많은 과외선생들을 포기시켰을 것이다. 참으로 오만방자한 녀석이었다. 나는 그 아이 대신에 그의 부모를 향해 속으로 욕을 했다. 이 아이의 부모는 어떻게 가정 교육을 하길래 사람에 대한 예의를 모르게 키웠을까? 나는 그 아이의 부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강의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놈은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는 것 자체를 참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잠시도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런 그를 무시하고 계속 수업을 진행하자, 그는 마침내 답답하다는 듯이 외마디를 지르면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나는 그의 광기를 보자, 나는 서울 노원구에 새롭게 아파트 단지가 무섭게 들어설 때 내가 그곳에서 한 아이를 가르칠 때가 떠올랐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남자 아이였다. 그의 위로는 5학년 누나가 있었다. 그의 누나는 과외를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학교 성적이 좋았지만, 그 남자아이는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아서 내가 그를 맡았다. 그의 엄마는 삼십 대 후반으로 미인일 뿐만 아니라 마음 씀씀이도 예쁜 좋은 사람이었다. 그때는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의 초여름이었는데 내가 그녀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그녀는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나에게 건넸다. 그녀는 맑은 목소리로 나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했으며 언제나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아들을 구제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은 학업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그 아이는 수업이 진행되면 이내 몸을 비비 꼬면서 힘들어 했다. 어느 날에 그는 연필을 마루에 집어 던지기도 했다. “민성아, 그래도 공부를 하면, 조금씩 조금씩 나아질 거야.” 나는 그 아이를 조심스럽게 달래가면서 수업을 진행하곤 했다. 내 스스로 돌이켜봐도 나는 나의 학생들을 가르칠 때마다 그들을 부드럽게 대했다.

사실 내 십 대 시절의 꿈은 훌륭한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내 스스로 고등학교를 하나 만들어서 정말로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싶은 꿈을 갖기도 했었다. 그런 구체적인 생각이 들었을 때가 내가 검정고시학원에 다닐 때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가지 않고 고졸학력시험으로 대신했다. 그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나는 총 네 군데의 학원을 다녔다. 첫번째는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그 이듬 해였다. 나는 대구의 한 학원에서 한 달만에 그만 두었는데 나의 수강료와 생활비를 지원하던 나의 큰 형의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서울에서 살면서 내가 학원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그 학원이 있던 곳은 일제시대에서 한국의 독립군을 이끌었던 한 장군의 아들이었던 김두한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서울 종로의 우미관 근처였다. 나는 그 금자탑학원에서 두 달 정도 다니다 그만뒀다. 나는 그곳에서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권순욱을 만났다. 세번째는 동대문구 신설동의 대원검정고시학원이었는데 학원의 수준이 나의 기준에 미달해서 한 달만에 그만뒀다. 내가 마지막으로 다녔던 곳은 동대문구 제기동의 경동시장 건물 2층의 경동검정고시학원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3개월 다닌 후  비용이 부족해서 그만 두었지만 나는 그후 두 달 뒤에 전국에서 실시된 GED 시험에 합격했다. 내가 고등학교 선생이 되고자 결심한 계기는 나의 마지막 학원에서 만난 한 선생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오상기였으며 법학을 전공하는 그는 그곳에서 영어를 우리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매일 인천에서 지하철로 출퇴근을 했다. 내가 그를 떠 올릴 때마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 “브릿지 오버 트러블드 워터 Bridge Over Troubled Water”가 생각난다. 어느 날 그가 그의 학생들 앞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그때 그의 눈물이 뺨으로 흘러 내렸는데 나는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후 그 노래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가사를 모두 알고 있는 영어 몇 곡에 그 노래가 포함된다. 그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정규 고등학교에 가지 못한 가난한 그의 학생들을 매우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그의 수업에 임했는지 그의 수업이 끝날 무렵이면 그의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지곤 했다. 권순욱는 나와 함께 그곳에서 공부했는데 그 외에도 나와 몇 년 동안 신문배달을 하면서 알고 지낸 정순일과 송명선도 있었다. 그리고 오상기의 영향으로 서울의 경희대학교 영어영문과에 진학한 강춘희도 있었다. 나는 순욱이와는 그 후부터 많은 시간을 함께 했는데 미래에 사립고등학교를 하나 만들자고 우리는 다짐했다. 오상기 선생처럼 학생들을 잘 가르쳐 보자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한 사람이 어린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나는 그때 크게 느꼈다.

그래서 내가 그 이후에 과외를 할 때도 학생으로부터 진심으로 존경받을 수 있도록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민성이는 나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선생님, 저는 죽고 싶어요. 저는 정말 죽고 싶어요. 저는 공부가 지긋지긋해요.”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나는 그 아이의 눈을 봤다. 그의 눈에는 언제라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떨어질 것 같았다. 내가 놀라서 그 아이의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나는 문득 섬뜩한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은 광기까지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그는 무엇인가 진심으로 나에게 호소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서워졌다. ‘아, 이 아이는 정말로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구나!’ 나는 갑자기 그 아이가 불쌍해졌다. ‘아, 그는 정말로 삶을 힘들어 하는구나!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하는 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나절 같이 놀다 오겠다고 민성이 엄마에게 양해를 구했다. 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버스를 타고 근처의 어디론 가에 갔던 것 같다. 당시의 노원구는 군데군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나머지는 단층짜리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기도 하고 외딴 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어지러울 정도로 여러 군데에 비닐하우스가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으며 과수원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날 그 아이와 함께 몇 시간동안 밖에 나가서 실컷 놀았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서 그 아이 엄마와 이야기를 나눴다.

“민성이가 너무 힘들어하고 있어요. 당신의 아들은 아주 영리하고 순수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학교 수업 이후에 너무 많은 학원에 아이를 보내는 것은 재고해야 합니다. 아이마다 그런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는 특성이 다 다릅니다. 민성이는 자기 시간을 많이 줘야 합니다. 우선, 개인 과외라도 끊는 게 좋을 것 같으니 나는 그만두겠습니다”고 했다.

그때 찹찹해 하던 민성의 엄마 표정이 생각난다. 그녀는 분홍색 입술을 지그시 물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주변 학부모들은 모두 그들의 아이들을 방과 후에 학원에 보내며 추가로 개인 과외를 하는 현상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더구나 아파트단지에 살다 보면 그런 분위기는 한 눈에 쉽게 파악되었다. 당시에 한국의 서울에는 아파트 단지들이 급속하게 팽창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새로운 아파트 단지들을 중심으로 사교육 시장이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민성이 엄마는 그녀를 둘러싼 교육 현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매우 복잡할 것이다.

“민성이는 지금 자기 주변에 신호를 보내고 있어요. 얼마나 힘이 들면, 그가 저한테 “죽고 싶다”고 말하겠어요.”

나는 그 소년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를 매번 만날 때마다 그는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내 앞에서 그는 까불거리다가도 공부하기 위해 자리에 앉곤 했다. 그는 그의 엄마를 닮아서 예쁜 미소를 가진 아이였다. 처음에 나는 그 소년은 공부보다는 늘 놀고 싶은 생각뿐이며 그는 전혀 진지하지 않다고 나는 판단했었다. 그런 어린 녀석으로부터 그런 충격적인 말을 들었 때, 처음에는 나는 그가 그냥 장난을 치는줄 알았다. 아마도 그는 자기 부모한테도 그런 신호를 자주 보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의 부모는 그를 얼리고 달래서 진정시키기에 바빴을 것이다. 나는 민성이와 나눈 대화를 그녀에게 전했다. 당신의 아들이 ‘죽을만큼 힘들다’고 표현했는데 우리는 그 아이가 당분간 쉴 수 있도록 해줘여 한다고 나의 의견을 말했다. 그녀는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무엇이 답답했던지 창문으로 와락 다가간 그 젊은이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 고교생의 뒷모습에서 힘 없이 축 쳐진 민성이의 어깨가 오버랩되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민성이는 그 무렵에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1학년쯤은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수업은 밖에서 할까?” 내가 그 청소년에게 제안했다.

“정말요?” 그 녀석이 믿기지 않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그래, 오늘은 수업을 하지 말고 신촌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오자.”

눈에 광기가 어려 있던 그 녀석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그의 얼굴색이 금방 밝아졌다. 나는 그 소년이 외마디를 지를 때, 몇 년 전의 어린 민성이가 생각이 났었다. 자기의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아이들은 초등학생이나 고등학생이나 도처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런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그의 부모들은 그들을 이해하는 대신에 그들을 벼랑 끝까지 밀어붙인다는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자기의 아이들이 하는 진심이 담긴 말을 들어 보려고 하지 않는다. 내 앞에 서 있는 그 아이도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소년은 숨이 막힐 듯이 촘촘하고 단단한 거미줄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의 힘으로는 그의 부모가 구축한 그런 환경을 벗어날 수도 없으며 그는 그 어떤 방법도 모른다. 나는 속히 그 집을 벗어나고 싶었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신촌으로 나가서 컴퓨터 오락실에서 게임도 하면서 몇 시간을 보내다가 그 아이를 그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물론, 그것으로 그 불쌍한 아이와의 인연은 끝이었다.

이상하게 그 이후에 그 학습지 회사에 들어간, 나와 아리랑 극단의 대표인 Mr. Kim과의 인연도 끝이 났다. 그후로도 나 역시 더 이상 방과 후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과외 일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나만의 길로 열심히 달려갔다. 나는 Kim과 더 이상의 관계를 잇지 못하였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그가 떠 오른 것은 마침 내가 며칠 전에 쓴 나의 다른 글에서 내가 그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한 칸짜리 월셋방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벽 한 면을 책장으로 꾸민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둔탁하고 길고 두꺼운 나무판자들을 이용해서 책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나무판자들 사이는 붉은 벽돌들을 쌓아서 받침대로 만들었는데 방의 한 벽면을 모두 가린 책장에는 그가 좋아하는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먼 훗날, 나는 그의 책장에서 영감을 받아 나의 거실을 그렇게 꾸몄다. 그 당시에는 내가 국제영화제를 창설해서 운영하고 청소년을 위한 영상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을 때여서 나에게는 전세계에서 온 비디오 자료가 아주 많았다. 그것들을 넣어 둘 공간이 필요했다. 나는 거실의 한 벽을 모두 가릴 정도로 큰 나무틀들을 만들었는데 나의 장인 어른이 도와주셨다, 그는 손재주가 많으셨다.

나는 먹고살기 위해 남을 가르치는 일을 많이 했다. 더 이상 방과후 교과 과정 과외를 하지 않은 후에는 나는 영상 캠프를 오랫동안 운영했다. 따라서 나에게 뭔가를 하나라도 배운 사람들은 수천 명에 달할 것이다. 지금쯤 그들의 나이는 30~50대일 것이다. 이제는 서로 기억도 못할 정도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기회가 있다면 만나고 싶은 나의 학생들이 있다. 그중의 한 명이 내가 이 글에서 언급한 민성이다. 나는 그가 진짜로 죽음을 선택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에 민성이는 그 시절의 어려움을 잘 극복해서 지금은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또 한 아이는 민성이와 마찬가지로 그 근처의 동네에서 나한테 개인 과외를 받았던 여학생이다. 그녀는 그녀의 부모님과 함께 1층 단독 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나와 성을 썼다. 당시에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미국식으로는 2학년)으로 신장이 168cm 정도로 컸다. 그녀는 아마도 내가 만나 본 사람 중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학과목에 자신 없는 그녀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기 위해 첫 수업에서 화학 주기율표를 가르쳐 줬다.

화학 표준 주기율표를 기억하는가? 나는 한국에서 대학 입시 준비 학원으로 압도적인 명성을 유지하던 종로학원 출신이다. 그곳에서 나의 화학수업을 담당하던 화학 선생이 있었다. 그는 얼마나 명확하면서도 효율적으로 화학을 우리들에게 가르쳤던지 나는 늘 화학 수업 시간이 즐거웠다. 사실 나는 GED 출신이므로 필수 과목만 배웠지만 대학입시를 위해서는 내가 평소에 한번도 공부한 적이 없는 필수 과목들이 많았다.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학생들은 이미 고등학교 3학년 동안 배운 화학이지만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배웠다. 그는 서울대학교 화학과 교수 출신으로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를 믿고 최선을 다하면 우리는 화학시험에서 만점을 받을 수 있다며 우리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곤 했다. 실제로 그는 그 복잡한 주기율표도 어렵지 않게 순식간에 외울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비법을 전수했다.

나는 몇 년 이 흐른 뒤에도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어서 그 여학생에게 그 비법을 가르쳐 줬다. 그리고 두번째 수업을 하기 위해 내가 그녀의 집을 다시 방문했을 때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나로부터 화학을 배운 후에 그녀는 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그녀는 점수를 아주 잘 받았다. 그녀는 들떠 있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화학이라는 과목은 거의 수학처럼 계산하는 내용이 많아서 수학을 싫어하는 학생들에게는 매우 괴로운 과목이다. 실제로 화학의 진도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복잡한 화학식과 계산이 시작되었다. 그 부분에서 그 소녀는 어려워 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그녀의 의지가 꺾였다. 그러한 그녀를 바라봐야 하는 나의 마음도 아팠다.

나의 수업은 그녀의 방에서 진행했는데 수업 전에 그녀의 엄마가 우리가 마실 것과 간단한 간식을 가져다 줬다. 그러다가 수업이 시작되면 그녀의 방문이 닫혔다. 나는 학교 수업에 필요한 여러 과목들을 그녀에게 가르쳤다. 내가 판단하건데 그녀는 아카데믹 분야보다는 연예계 분야가 그녀의 적성에 더 맞을 것 같았다. 그랬다면 그녀는 아마도 크게 성공했을 것이다. 당시의 한국 사회에서는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가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일을 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다. 대신에 큰 기업에 취업하거나 최고 인기 전문직(변호사, 검사, 판사, 의사나 교수)을 갖기를 희망했다.

그녀는 나와 공부하는 것이 지루해 지면 잡담을 하곤 했다. 그 중에서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이 있다. 그녀가 베스트 프렌드가 있었는데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방학때 서울에서 그녀가 그녀의 친구를 만나서 벌어진 헤프닝이었다. “내 친구가 여름 방학을 이용해서 한국에 들어왔는데 예전에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그랬듯이 내가 그 친구의 손을 잡고 길을 걸어가는데 그녀가 나의 손을 슬며시 떼어 놓는거에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나에게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내가 ‘왜 그래?’하고 물으니, ‘미국에서 여자끼리 손을 잡으면 그 뜻은 서로 사귀고 있는 것으로 받아 들인다’고 내 친구가 나에게 말하는 거에요.” 그녀는 여전히 그녀의 큰 눈망울을 동그랗게 뜨면서 억울하다고 나에게 하소연했다. 사실 나도 그 당시에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 역시 내 남성 친구들과는 손을 맞잡고 길을 걸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한국에서 외국 사람들이 봤다면 ‘동성연애’가 한국에는 많다고 충분히 오해했을 거였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놀라워하면서 웃었다.

그 소녀의 책상은 벽에 밀착되어 있었으므로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공부를 했다. 그때가 초여름이었으므로 우리는 반소매 차림이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오른 팔과 내 왼 팔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늘 있었다. 나의 과외 횟수가 늘어나면서 그 소녀는 나에게 가끔 스킨십을 시도했다. 그녀의 보드라운 털과 나의 털이 만나 부딪히는 미묘한 느낌은 아주 짜릿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얼른 그녀의 팔뚝으로부터 나의 팔을 떼어냈다. 그 소녀는 점점 남녀 간의 호기심 있는 주제로 나와 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한 번은 그녀가 나에게 장난처럼 키스를 시도하기도 했다. 우리의 나이 차이도 대여섯살 밖에 나지 않았음으로 서로 이성으로서 호기심을 느낀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도덕적인 기준이 확실한 사람이었으므로 냉정하게 판단을 해야 했다.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에게 교습을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다. 물론 나는 적당한 핑계를 댔을 것이다.

가끔 십 대와 이십 대의 나의 불쌍했던 청춘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그 소녀도 생각난다. 그녀는 도봉구 쌍문동에 있는 정의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정의여자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녀는 안타깝게도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쾌활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아이였다. 만일 행운의 신이 함께 해서 그녀가 자신의 적성과 재능을 찾아 지금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기원한다.

노원구의 초등학생 3학년짜리 민성이, 서초구의 고등학교 2학년짜리 목사 아들, 도봉구의 정의여자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그 소녀, 이들 모두가 내 슬픈 청춘과 함께 했던 아이들이었다. 나처럼 그들도 언젠가는 활짝 웃으면서 옛날을 회상하고 있기를 나는 바란다. 쥐구멍에 해가 뜨려면 쥐구멍을 파헤쳐야 한다. 그 쥐구멍이 단단하고 깊어서 도저히 햇빛이 들어갈 수 없다면, 아예 포크레인 같은 것으로 그 현장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혁명 같은 일이 필요하다. 해가 뜨기를 마냥 기다리지 말고 그곳을 과감하게 벗어나는 것도 자신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던져 주는 방법이다.

나는 살면서 그렇게 나의 상황을 뒤집어 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비록 때로는 더 악화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좀 더 나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다. 내 나름대로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며 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뒤돌아보며 후회하는 것보다 꿈을 꾸면서 설레는 것이 좋다. 나는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과외교습을 많이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는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장학교실’과 같은 학습지를 집집마다 배달하는 일을 할 때에도 나는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 했다. 매일매일 발행하는 이 학습지들은 비싼 개인과외 시장에 접근할 수 없었던 한국의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 일일 학습지지만 매우 저렴했다. 학생은 집에서 학습지를 받아 스스로 문제를 풀면 그 다음 날 해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학습지 배달원은 집집마다 들려 학생들이 미리 풀어 놓은 문제지를 점검해서 틀린 문제를 설명했다. 나에게 할당된 가구수는 100여 가구가 넘었지만 비록 내가 한 집에 머무는 시간은 짧았지만 나는 그 순간에도 그들의 좋은 선생이 되려고 노력했다. 내가 과외 선생이었을 때 나로 인하여 단 한 사람이라도 좋은 영향을 받았으면 하는 희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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